중기사업계획과 부처안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업무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던 게 바로 예산업무였습니다. 예산 업무에도 종류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비중이 높으면서도 힘든 업무가 예산편성 업무입니다.
예산편성은 1월부터 11월 말까지 죽 이어집니다. 1월에는 중기사업계획서를 제출해야 하는데, 향후 5개년 간 예산을 얼마나 어떻게 쓸지 제출하는 것입니다.
사실 한 치 앞도 모르는 세상에 5개년 계획을 꼼꼼하게 검토해서 작성해서 내지는 않습니다. 대규모 인프라와 관련되어 있는 다년도 사업 정도는 어느 정도 계산해서 낼 수 있겠지만, 일반적인 단년도 사업(1년 안에 끝내는 사업)은 그냥 대충 사업마다 '매년 몇% 씩 증액해서 쓰겠다' 제출하곤 합니다.
중기사업계획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신규 사업이나 아니면 증액이 필요한 사업에 대해서는 어차피 본 예산 편성할 때에 본격적으로 검토해서 내기 때문입니다. 다만, 기재부에서는 가끔 '중기사업계획에 내지 않은 사업을 왜 본 예산 편성에 넣었냐'는 식으로 예산을 깎으려는 논리로 쓰이기도 합니다.
1월은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예산 편성 업무가 진행됩니다. 자료를 작성하는 주무관들이 임의로 예산을 배정하기도 합니다. 계획서를 작성하면서도 별 검토 없이 ‘허허 이게 되겠어요?' 하면서 말이죠.
하지만 예산 자료를 직접 작성하는 주무관들은 최소 수십에서 수백 페이지에 이르는 중기사업계획서에 수 백 개의 숫자를 맞추느라 눈알이 빠집니다. 최소 5번 이상은 조정이 되기 때문에 그에 맞춰서 매번 숫자를 맞춰야 합니다. 예산 한도를 딱 정해주면 좋은데, 그게 자꾸 변해버리니 세부적인 사업별로 예산을 다시 맞춰야 합니다.
특히 제가 있던 기관은 예산 체계가 매우 '더러워서' 더 힘들었던 것 같네요. ('더럽다'라는 말은 예산 규모에 비해서 하위에 세세한 사업들이 너무 많이 구분되어 있어서, 관리하기가 힘든 예산 체계를 뜻합니다.)
보통 2월 말부터는 '부처안'을 작성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 부처에서 예산이 얼마가 필요한지 작성하여 기재부에 제출하는 예산안입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신규 사업을 발굴해라', '예산 증액 건 발굴해라'라는 식으로 지시가 떨어졌습니다.
이 시기마다 들었던 생각이, 먼저 불필요한 사업을 좀 정리하고 새로운 걸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별 효과도 없는 거 다 알고, 관성적으로 지출하는 예산인 걸 알면서도 예산을 자체적으로 감액하는 것은 힘듭니다. 왜냐하면 부처의 목적은, 큰 문제가 없다면 어떤 식으로든 예산 규모를 늘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굳이 먼저 감액을 요구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감액을 위해서는 '명분'이라는 게 필요합니다. 매번 돈을 받던 사람들이 '올해는 왜 안 주려고 하냐'라고 했을 때, 명확하게 할 말이 있어야 하고, 있더라도 그들에게 설명하고 설득하려는 과정도 있어야 합니다. 혹시라도 그들에게 윗선에 아는 사람이 있다면 일이 커지기 때문에, 실무자가 굳이 먼저 나서서 감액을 하겠다고 주장하기는 힘듭니다.
즉 각 부처 공무원은 먼저 감액하거나 사업을 구조조정할 유인이 하나도 없습니다. 힘들고 귀찮기만 하고 본인의 실적에도 한마디 넣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그 시기에는 신규 사업 발굴이나 증액 논리 개발하는 데에 집중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럴 여력도 별로 없습니다. 결국 이렇게 불필요한 사업과 예산이 줄줄이 늘어나게 됩니다.
감액을 위한 확실한 명분을 가지기 위해서는 국회나 각종 평가에서 지적을 받아야 합니다. 이렇게 '별 효과가 없다'라고 지적받는 사업은 예산을 줄이거나, 아예 폐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게, 외부에서 보았을 때와 내부에서 보았을 때의 시각이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내부에서 볼 때는 정말 필요한 사업인데, 그걸 단편적으로만 보고 지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반대로, 내부에서는 매우 불필요한 사업인데, 외부에서는 대강 보고 지적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외부에서 내부 사정을 제대로 알기 힘들고, 내부에서는 허술한 사업도 잘 보이기 위해서 포장을 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신규 사업이나 예산 증액은 대체로 세 가지 경로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같이 일하는 공기업 등이 예산 반영을 요구하는 사업을 검토해서 넣는 경우가 있고, 위에서 어떤 방향을 정해주고 그에 맞는 사업을 기획해서 예산에 반영하기도 합니다. 또, 지자체나 국회 등 외부에서 요구가 있어서 검토하고 예산을 편성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각 경로마다 장단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공기업 등의 사업자가 요구하는 사업은 '비교적' 체계가 이미 갖춰져 있는 경우가 많고, 사업을 추진하고 집행하려는 의지가 있기 때문에 반영이 되면 관리하기는 쉽습니다. 다만, 그 사업 방향이 굳이 예산을 들여서 해야 하는 것인지 의문이 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반영될 가능성이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국회나 윗선에서 별 관심이 없는 사업이라면 반영될 가능성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윗선이나 국회 등 외부에서 요구하는 사업의 경우에는 비교적 반영 가능성이 조금 더 높습니다. 힘 있는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기 때문에 명분이 생겨 기재부나 국회에 설명할 때 논리가 부족해도 가능합니다. 다만, 세부적인 사업 기획을 직접 해야 하고, 그 사업을 직접 추진할 공기업 등 사업자를 찾아야 하기 때문에 집행이나 관리가 힘듭니다. 예산 반영이 되어도 사업의 추진력을 얻기 힘든 것입니다.
윗선의 목적은 '본인이 새로운 사업을 개발해서 예산을 증액했다.'라는 실적이 주 목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윗선에 있는 공무원의 경우에는 발령 주기가 매우 짧기 때문에 그냥 책임감 없이 '일단 증액하고 떠나자'는 유인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국회 등 외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산을 본인들이 반영했다!'라는 보도자료나 현수막 하나만 있으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냥 질러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사업이 잘 되든 못 되든, 현실 가능성이 있든 없든 본인들은 예산을 반영했고, 만약 사업이 잘 못된다고 하더라도 그건 집행하고 관리를 한 공무원 탓이 됩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예산 반영이 안 되었을 때 안도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어쨌든 이러한 과정을 거쳐 부처안을 작성하여 각 과와 국내에서 편성 한도를 놓고 조정하고, 조정한 안을 예산 총괄 부서에 제출하고 설명을 하면, 사업의 현실 가능성, 사업 방향 등을 검토하게 됩니다. 5월 말이 되면 최종적인 부처안을 기재부에 제출하게 됩니다.
주무관들은 매번 조정이 될 때마다 수십에서 수백 페이지에 해당하는 한글 파일을 수정하고 고치고 계산합니다. 매년 괜히 양식이 달라지는 경우가 많아, 항상 구시렁대면서 자료를 작성했던 것 같습니다. 자료의 버전은 최소 v10가 넘습니다. 단순히 한 단위의 사업을 담당하는 주무관도 힘들긴 했지만, 예산을 총괄하는 부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수 만장에 이르는 자료를 검토하고 조정하고 정리하면서 매일이 야근의 연속입니다. 가끔 잘 못 입력한 거 아니냐고, 연락이 오면 너무 죄송했네요.
한편, 몇 년 전부터 무슨 예산업무를 디지털 전환을 하겠다며, 모든 예산안 내용을 예산 프로그램에 모두 입력해야 했습니다. 프로그램 자체도 정말 구려서 입력하는 속도도 느리고, 한글 파일에 작성하는 양식과 비슷한 양식에 똑같은 내용을 집어넣어야 해서 그냥 똑같은 일을 두 번 하는 것이었습니다. 대체 디지털 전환을 한다면서 왜 일을 두 번 시키는지... '노동집약적 디지털 전환'아니냐며 동기들과 자조 섞인 농담을 하면서 또 열심히 입력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