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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노비와 국회(1) 징계 위기

첫 번째 국정감사

by freenobby

"담당자 징계하세요!"


처음 맞이하는 국정감사부터 저는 한 국회의원으로부터 징계요구를 받았습니다.



8월 중순, 여름휴가 시즌이 지나면 공무원들은 국정감사 수감 준비를 위해서 바빠집니다. 이때부터 어마어마한 양의 국정감사 요구자료가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당시 제 업무도 그렇고 전체 과 업무를 통틀어도 국회에서 크게 관심을 가질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별도의 국정감사 자료를 작성할 필요도 없었고 그냥 과 서무로서 일반적인 공통자료만 몇 개 작성하여 큰 부담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국정감사가 언제 시작하는지도 몰랐습니다.


국정감사 당일에, 과의 막내로서 '국정감사 모니터링' 업무를 맡았습니다. 우리 기관과 관련된 내용이 나오면 무슨 내용인지 정리해서 자료를 작성하는 업무였습니다.


예상대로 국정감사가 거의 마무리될 때까지 우리 기관 자체에 대한 지적사항은 몇 개 나왔지만 이미 예상된 내용이었고, 우리 과와 관련된 내용은 하나도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그냥 귀에 이어폰을 꽂고 다른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어폰에서 너무나도 익숙한 음악과 내레이션이 들렸습니다. 섬뜩한 기분이 들어 재빨리 국정감사 생방송 영상을 띄웠습니다. 순간 X 됐음을 본능적으로 인지했는지 머리가 멈췄습니다.


'응? 이게 뭐였더라..?'


그리고 바로 과장님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이거 우리 과 내용 같은데 누구 담당이야?"


그 순간 바로 깨닫고 대답했습니다.


"저 저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국회 생방송 영상에서 그 국회의원은 우리 기관장님에게 소리쳤습니다.


"담당자 누굽니까? 담당자 징계하세요!!"


기관장님은 아무것도 모르는 내용이라 '일단 확인해 보고 조치하겠다'라고 답변했습니다. 그리고 그 국회의원은 한 마디 덧붙였습니다.


"내가 아는 교수님이 있어요. ㅇㅇㅇ교수님인데, 연락해서 검수받고 다시 만들고 직접 와서 보고하세요!"




그 당시, 국회의원은 국정감사장에서 영상을 하나 틀어주고 있었습니다. 그 영상은 제가 몇 달 전 담당해서 만들었던 특정 분야의 홍보 영상이었습니다. 그 국회의원은 그 분야와 관련된 비례대표로, 그 분야만 유난스럽게 파고들어서 질의를 하는 국회의원이었습니다.


그 국회의원이 영상과 관련하여 지적한 부분은 3가지였습니다.


첫 번째, 영상에서 나오는 통계가 본인이 알고 있는 수치에 비해 너무 적게 언급되었다.

두 번째, 본인이 그 분야에서 달성했던 기네스 기록을 영상 내용에 담지 않았다.

세 번째, 그 분야와 관련된 조직의 영어명이 잘못되었다.


솔직히 두 번째 지적사항은 그 기네스 기록을 영상에 담는 게 말도 안 되는 것이었고, 심지어 영상 제작 이후에 기록이 달성되어서 그냥 무시할만한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첫 번째와 세 번째 내용이 잘 못되었다면 정말 제 책임이 큰 부분이라 겁이 많이 났습니다.


해당 영상은 그 분야의 전문 기관과 협업해서 만든 영상이라, 내용에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습니다. 일단은 영상 제작을 직접 담당했던 분께 연락해서 자초지종을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깜짝 놀라며 본인들도 검수를 마친 건데 그럴 리가 없다며 확인해 보고 연락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과 내 분위기도 어수선해졌습니다. 사실 몇 년간과 내의 업무가 국정감사에서 언급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옆과 사무관님도 오시더니 장난인지 위로인지 말을 건넸습니다.


"아니 ㅇㅇ씨는 뭐 오자마자 징계받게 생겼네? ㅎㅎ 장난이고 괜찮을 거야. 너무 걱정 마"


그리고 옆과 주무관님은 그 국회의원이 언급했던 ㅇㅇㅇ교수님을 안다면서, 바로 전화번호를 알려주었습니다.


"나 국정감사만 몇 십 년 했는데, 이런 경우는 또 처음 보네 ㅎㅎ ㅇㅇㅇ교수님 연락처니까 연락해 봐요."


"감사합니다 ㅜㅜ"


바로 그 교수님께 연락을 드렸습니다.


: 안녕하세요 교수님. ㅇㅇ기관에 ㅇㅇㅇ라고 합니다. 잠시 통화 괜찮으신지요?

교수님: 아 네, 무슨 일이신가요?

: 아 혹시 ㅇㅇㅇ의원님 아시는지요? 방금 국정감사장에서 ㅇㅇㅇ의원님이 교수님께 연락해서 검수를 받으라고 하셔서... 이렇게 연락드렸습니다.

교수님: 네? 아니 뭐 그렇게 잘 아는 분은 아닌데, 국정감사장에서 내 이름이 나왔다고요? 허허허 무슨 일이래


자초지종을 설명을 드리고 있었는데, 옆에서 전화를 듣고 계시던 과장님과 사무관님은 '빨리', '성의 있게' 처리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내일 바로 찾아뵙겠다고 하라며 재촉했습니다.


: 교수님 혹시 내일 시간 되실까요..? 저희가 시간은 다 맞추겠습니다

교수님: 내일은 지방 출장이 있어서 좀 힘들 것 같은데요. 그냥 전화로 해도 되지 않아요?


옆에 계시던 과장님과 사무관님께 말씀드리니, 그냥 찾아뵙겠다고 하라고 하시더군요.


: 출장지가 어디신지 말씀 주시면 저희가 찾아뵙겠습니다

교수님: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뭐 알겠습니다.


결국 일정에 없던 지방 출장이 퇴근 전에 잡히게 되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자차를 끌고 사무관님과 함께 3시간에 걸쳐서 교수님이 계신 곳으로 향했습니다. 살면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었습니다.


그 의원이 지적한 사항에 대해서는 이미 사실 확인이 끝난 상황이었습니다.


첫 번째, 너무 적다고 지적받았던 통계수치는 어림 잡아서 여기저기 다르게 표현하는 수치였습니다. 오히려 그 의원이 너무 과대하게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기네스 기록은 솔직히 별 대단한 내용도 아니어서 언급할 가치가 없었습니다

세 번째, 선후관계가 애매했지만 영상 제작이 딱 끝난 시점에, 그 조직이 이름을 바꾼 것이었습니다.


그냥 통계와 조직이름만 영상에서 바꾸면 되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성의를 보여야 한다'라는 것 때문에 먼 출장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교수님이 계신 학교에 도착했습니다. 교수님은 복도에 있는 텅 빈 휴게 공간에 혼자 앉아 계셨습니다. 테이블과 의자는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고, 쓰레기가 여기저기 굴러다니고 있었습니다.


교수님과 명함과 인사를 나누고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이미 어제 전화로 이야기는 거의 다 나눴지만 다시 그 문제에 대해서 여쭈어보았습니다.


: 혹시 어제 보내드렸던 영상 보셨지요..? 잘 못된 게 있을까요?

교수님: 뭐 어제 말씀드렸다시피... 그 통계는 그냥 여기저기 다 다른 것이고요. 보통 5~7천만이라고 하는데, 의원님이 말했던 1억은 너무 나간 것 같아요. 영상 자체 내용은 전반적으로 다 괜찮습니다.

: 아 그렇군요.

교수님: 그리고 그 기네스 그건...ㅎㅎ 그 의원님이 좀 유난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조직 명칭은 지금 시점에서 잘 못된 게 맞고요... 고생이 참 많으세요. 이런 것 때문에 여기까지 오시고...


3시간에 걸쳐서 출장 와서, 교수님과의 대화는 3분 만에 끝이 났습니다. 교수님께서 자판기에서 커피 한 잔 뽑아주셨는데, 커피가 식기도 전에 말이죠.



출장을 다녀와서 바로 영상을 수정했습니다. 기네스 기록은 도저히 넣을 수가 없어서, 통계수치와 조직명칭만 수정하여 마무리했습니다.


과장님께서 수정된 영상을 가지고 의원실에 직접 방문했습니다. 보통은 보좌관에게 설명하고 끝나는데, 그 의원이 마침 의원실에 있어서, 직접 설명을 했다고 합니다.


국감장에서 말했던 '징계'를 언급하면 어떡하지 계속 걱정했었는데, 과장님이 말씀하시길


'그냥 지적하신 대로 고쳤다고 하니깐 영상은 보지도 않고, 그냥 웃으면서 자기 자랑 몇 십분 하다가 끝났어'


첫 번째 국정감사는 그렇게 마무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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