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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GA PEOPLE May 27. 2018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다 읽었다.

"무라카미 씨처럼 매일 건강한 생활을 하고 있으면, 그러다가 소설을 쓰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요?" 같은 말을 때때로 사람들로부터 듣는다. 외국에 있을 때는 별로 듣는 일이 없는데, 일본에서는 그런 의견을 가진 사람이 꽤 많은 것 같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불건전한 행위이고, 작가라는 사람은 공서양속(공공질서와 미풍양속을 아우리는 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되도록 건전하지 않은 생활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작가는 속세와 결별하고 예술적 가치를 지닌 순수한 뭔가에 더욱 근접할 수 있는 것이다, 라는 통념 같은 것이 세간에 뿌리 깊게 존재한다. 긴 세월에 걸쳐 그와 같은 예술가=불건전(퇴폐적)이라는 도식이 형성되어 온 것 같다.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에는 자주 이러한 스테레오 타입의-좋게 말하면 신화적인-작가가 등장한다.

소설을 쓴다는 것이 불건전한 작업이라는 주장에 나는 기본적으로 찬성하고 싶다. 우리가 소설을 쓰려고 할 때, 다시 말해 문장을 사용해 이야기를 꾸려 나가려고 할 때는 인간 존재의 근본에 있는 독소와 같은 것이 좋든 싫든 추출되어 표면으로 나온다. 작가는 다소간 그런 독소와 정면으로 마주하고, 위험을 인지해서 솜씨 좋게 처리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와 같은 독소가 개재되지 않고 참된 의미의 창조 행위를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묘한 예를 들어서 미안하지만, 복어는 독이 있는 부위가 가장 맛있다고 하는 것과 조금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건전한'작업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요컨대 예술 행위라고 하는 것은 애당초 성립부터 불건전한 반사회적 요소를 내포한 것이다. 나는 그것을 기꺼이 인정한다. 그러니만큼 작가(예술가) 중에는 실생활 그 자체의 레벨부터 퇴폐적으로 전락하고, 또는 반사회적인 의상을 걸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것도 이해할 수 있다고 할까. 그와 같은 자세를 결코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 생각이지만 오랫동안 직업적으로 소설을 써나가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와 같은 위험한(어느 경우에는 목숨을 내놓는 경우가 되기도 한다) 체내의 독소에 대항할 수 있는 자기 면역 시스템을 만들어야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좀 더 강한 독소를 바르고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하면 좀 더 힘 있는 이야기를 써나갈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 자기 면역 시스템을 만들어놓고 오랜 기간에 걸쳐 유지해 나가려면 강력한 에너지가 필요하게 된다. 어딘가에서 그 에너지를 구해야만 한다. 그런데 우리 자신의 기초 체력 위에 그 에너지를 구할 수 있는 곳이 존재할까?

오해할 수도 있지만, 그러한 방법이 작가에게 유일한, 옳은 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문학에는 여러 종류의 문학이 있듯이 작가도 여려 종류의 작가가 있다. 그리고 그들 작가들은 각기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다루는 것도 다르고, 목표하는 곳도 다르다. 당연한 것이다. 그러므로 소설가에게 있어서 유일한 올바른 방법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다.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나 자신에 관해서 말해달라고 한다면 '기초 체력'의 강화는, 좀 더 큰 규모의 창조를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될 일의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것은 해볼 만큼의 가치가 있는 일이다(적어도 하지 않는 것보다 하는 쪽이 훨씬 좋다),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무척 평범한 견해이긴 하지만, 흔히 말하듯,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에는 열심히 하는 만큼의(어떤 경우에는 지나치리만큼의) 가치가 있다.

참으로 불건전한 것을 다루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되도록 건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나의 행동 목표이다. 다시 말하면 불건전한 영혼은 또 건전한 육체를 필요로 하는 까닭이다. 역설적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직업적인 소설가가 된 이래 지금까지, 내가 몸소 절실하게 느껴온 것이다. 건강한 것과 건강하지 못한 것은 결코 대극점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대립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건강한 것과 건강하지 못한 것들은 서로를 보완하고, 어떤 경우에는 서로를 자연스럽게 감싸 안을 수 있는 것이다. 때때로 건전함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건전한 것만을 생각하고, 불건전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불건전한것만을 생각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편향은 인생을 진정으로 내실 있는 것으로 만들기는 어렵다.

젊었을 때 뛰어나게 아름답고 힘이 있는 작품을 썼던 작가가 어느 연령대에 접어들자 급격하게 피폐해져 가는 일이 있다. '문학적 조루'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것처럼 독특한 피로 현상을 보인다. 쓰는 것은 여전히 아름다울지도 모른다. 또 그 문학적 위축 현상을 겪는 작가에게는 나름의 정취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창작 에너지가 감퇴하고 있는 것은 누가 봐도 확실하다. 그것은 그 또는 그녀의 체력이 자기가 다루고 있는 독소와 싸워 이길 수 없었던 결과가 아닐까, 하고 나는 추측한다. 이제까지 독소를 자연스럽게 능가해왔던 육체적인 활력이 하나의 정점을 지나면서 그 면역 효과를 서서히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또는 그녀는 여태껏 해온 것과 같은 주체적인 창조 행위를 계속해가는 것이 어려워진다. 상상력과 그것을 지탱하는 육체 능력의 밸런스가 무너져버린 것이다. 그 뒤는 그 때까지 키워왔던 테크닉과 방법을 잘 활용하고 남은 열정 같은 것을 이용해 작품의 형태를 그냥 마무리해갈 수밖에 없다. 그것은 아무리 조심스럽게 표현해도 결코 즐거운 인생의 여정일 수는 없다. 사람에 따라서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목숨을 끊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또는 깨끗이 창작을 단념하고 다른 길을 찾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되도록 그와 같은 위축 현상을 피하고 싶다. 내가 생각하는 문학이라는 것은 훨씬 자발적이고 구심적인 것이다. 거기에는 자연스럽고 긍정적인 활력이 있어야 한다. 나에게 있어 소설을 쓰는 것은 험준한 산의 암벽을 기어오르고, 길고 격렬한 격투 끝에 정상에 오르는 작업이다. 자신에게 이기든지 아니면 지든지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그 같은 내적인 이미지를 염두에 두고, 나는 언제나 장편소설을 쓰고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언젠가 사람은 패배한다. 육체는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쇠잔해간다. 빠르건 늦건 패퇴하고 소멸한다. 육체가 시들면(우선 아마도)정신도 갈 곳을 잃고 만다. 그와 같은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지점을- 결국 내 활력이 독소에 패배해서 뒤처지고 마는 지점을- 조금이라도 뒤로 미룰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소설가로서 내가 목표하고 있는 것이다. 우선 지금의 나에게는 '쇠태해 있을' 겨를이 없다. 그러니만큼 "저런 자는 예술가가 아니다"라고 누가 말한다 해도 나는 계속 달린다.

<달리기를 말할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_무라카미하루키.



어릴때는 연애만화를 그리고 싶었다. 그림과 이야기, 캐릭터 속에 오만가지 감정들을 온통 쏟아부울 생각을 했었는데, 그런 작품들이 나를 대변할거라는 생각을 하니 사회적으로 몹시 부끄러운 일이 될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사회가 나를 알아줄리도 없는데 말이다, 행여 주변 측근들이라도ㅎㅎ) 타인에게 내가 드러나는게 싫었다. 감정이 들켜벼리면 왠지 빈털터리가 되는 느낌이었다. 

그런 예술가들을 싫어했다. 사람의 감정(특히 사랑)을 주제로 하는 그림과 음악들이 싫었다. 그런것이 더 잘 표현되면 표현될수록 상대방의 감정이 충분히 고려되지 못한.. 자신의 업적으로 환원시키는 그들의 일이 참 싫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런걸 비난 할 만한 위인이 못된다는 것도 명백한 사실이었다. 만남에 있어서 나의 첫사랑이 늘 문제가 될 때마다 다음번에는 더 잘 숨겨야겠거니 더 아무렇지 않게 넘겨야겠거니 했지만 단 한번도 그것에 성공한 적이 없다. 상처받는 타인의 모습을 볼 때마다 그로 인해 더 상처받아야 했던 내가 늘 그 곳에 혼자 남아 있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우린 서로가 모두 미성숙했다. 

이젠 뭐든간에 예술을 거부해온 기나긴 경력도 있지만, 선천적으로 타고난 본성을 더는 음지로 처박아두고 싶지 않다. 내 삶을 퇴폐적으로 여기고, 도덕적인 문제를 운운하며 앞으로 만나게 될 사람(아직 만나지도 않은)에 대한 예의범절까지 고려하며 별별 노력을 한다한들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읽으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주 오래전부터 가끔씩 생각해보던 문제들. 명쾌한 해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퇴폐와 예술의 연결고리에 대해.. 예술가가 되고 싶은 평범하지만 조금은 퇴폐적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이야기들 이었다. 역시 오늘도 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지 분명히는 모른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한다. 창작을 하려거든, 예술을 하려거든. 자신의 감정에 대해 밑도 끝도 없이 진솔해져야겠다고, 육체적 단련, 정신적 단련이란 그런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무슨상황으로든 흔들리지 않는 신념, 더럽게 보여도 그것을 온전히 들춰내고 스스로의 언어로 표현하며 그것을 작품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긍지. 이 모든 것이 올곧고 건강하지 않으면 못할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온실속의 화초같은 흔해 빠진 적당한 사랑에는 이제 관심이 없다(언제나 없었지만).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해 본 적은 단 한번도 없었으니, 이제서야 조금 떳떳해진 홀가분한 마음이 든다.
영화처럼 살고 싶다. 모든걸 다 양보한다 해도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 한번뿐인 인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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