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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느 Jul 17. 2022

남들보다 짧은 나, 오히려 좋아!

슬로우스타터레터 #2

슬로우스타터 첫 뉴스레터를 발송한 지 벌써 2주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순식간에 무더워진 여름날을 느끼며, 어떤 클라이밍 이야기를 할까 고민하는 나날을 보냈다. 시작하기까지 오래 걸리는 성격을 닮았는지 클라이밍 실력까지 느릿느릿하게 느는 과정에서 겪은 이야기를 지금부터 풀어보겠다.




↕ 151cm, ↔ 148cm인 내가 암리치 탓하지 않는 이유


우리 반 최단신은 나야, 나


클라이머들과 모여 이야기를 나눌 때면 빠질 수 없는 ‘리치’. 클라이밍 실력이 느리게 느는 것 같은 요인을 찾으라고 하면 가장 먼저 꼽게 되는 리치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네. 편지를 가장한 울분에 찬 하소연, 맞습니다.)


아무도 궁금하지 않겠지만, 제 키는 151cm입니다. 감이 잘 안 온다고요? 2018년 학생건강검사 표본통계에 따르면 요즘 초등학교 6학년 평균 키가 152cm라고 하네요. 주변의 초등학생 친구들을 생각해주시면 될 듯합니다. 찾아보니까 더 슬퍼지네요.


작년 11월부터 저는 볼더링 클라이밍을 배우기 시작했는데요. 4명이 모인 반에서 저는 당당하게 최단신을 담당했습니다. 이 포지션을 통해 자연스럽게 우리 반의 프로응원러로 성장했는데요. 선생님이 준비한 문제 중에서 손이나 발이 안 닿으면 맥없이, 또 빠르게 떨어진 다음, 밑에서 열심히 다른 친구들을 응원했거든요. ‘시느가 했으면 우리도 할 수 있어!’라는 소리도 강습 시간에 많이 들었습니다.


"조금만 더!"라고 외치는 클라이머들의 응원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사진 (영상 캡처라 화질구지여서 더 슬프게 느껴지네요)


“키 작고, 팔 짧은데, 힘들기까지 한 걸 왜 해?”


클라이밍을 배운 지 반년이 흘렀지만, 실력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인 듯했습니다. 손과 발이 닿지 않는 문제는 항상 있고, 여기에 몸에 완벽히 익지 않은 발 기술과 통 늘지 않는 근력의 조합이 저를 매 순간 좌절하게 했죠.


문제를 준비한 의도와 달리 제가 홀드를 만지지도 못하고 떨어질 때마다 고개를 갸웃하는 선생님을 보는 날이면 더욱 침울해졌습니다. 나는 왜 키가 작은가, 팔이 짧은가. 제가 만들어낼 수 없는 동작으로 완등하는 사람들을 보며 자신을 탓하기도 했어요. (물론, 어려운 문제다 싶을 때마다 리치 때문이라며, 애초에 내가 할 수 없는 문제라고 애먼 선생님을 탓한 때가 더 많았던 건 굳이 비밀로 하지 않겠습니다.)


어느 날에는, 친구 중 한 명이 제게 ‘그렇게 열받아하고 힘든데 왜 계속해?’하고 물어왔어요. 순간 ‘어, 그러네?’ 했죠.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거든요. 반년 동안 주 2회 강습, 주 2회 개인 운동. 일주일에 4번이나 할 정도로 열심이면서 왜 이렇게까지 클라이밍에 빠지게 됐는지 깊이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리치를 극복하기 위해 자라나는 고구마(전완근)


나만의 길을 찾아간다는 즐거움


집으로 가는 길에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뚜렷한 리치 차이로 풀지 못하는 문제가 있어도 클라이밍을 놓지 않는 이유를요.


평소 저는 남들보다 일궈낸 것이 적다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주변 친구들을 보면 번듯한 직장을 다니고 있거나, 전공을 살려 작가로 활동 중이거나, 창업해 나름의 사업 수완을 발휘하는 등 어려움 없이 각자의 삶을 꾸려나가는 듯했거든요. 그때마다 저는 스스로 나아갈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기만 하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왜 저 친구처럼 하고 싶은 일을 못 하며 살까? 나는 왜 글을 못 쓸까? 나는 왜?


타인과 자신을 끝없이 비교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때 클라이밍을 만났습니다. 한 가지 색의 홀드만을 사용해 올라가려면 먼저 완등하기 위한 ‘길’을 찾아야 하는데요. 처음 저는 다른 사람이 보여준 동작을 따라 하며 문제를 풀었습니다. 보기에 어려운 동작으로 완등하면 ‘나도 해낼 수 있다’는 성취감을 얻을 수 있었죠.


난도가 올라가면서는 리치의 차이로 점점 남이 가는 길을 따라갈 수 없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클라이밍을 그래도 포기하지 않는 나,를 발견한 것은.


왜 안 되지? 못하겠어, 라며 포기하기엔 이미 클라이밍이 주는 성취감에 중독되어버렸고, 나는 왜 안 되지? 그러면. ‘나는 어떤 길을 찾아야 하지?’로 관점을 다르게 생각하게 됐습니다.


오래 고민한 끝에 스스로 찾아낸 길로 완등하는 순간이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는데요. 특히 스스로 이룬 것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던 제게 더욱 큰 기쁨으로 다가왔습니다.


이제는 친구들이 ‘왜 그렇게 열심히 해?’ 물으면 이렇게 대답합니다.


“수십 번 떨어져도 스스로 고민한 길로

결국 완등했다는 성취감이 있는 운동이라서.”


여러분, 이런 마음으로 클라이밍 같이 해요!(본격 클라이밍 영업 중)


칠흑처럼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것 같은 지난한 시기를 보낼 때 클라이밍을 통해 얻은 성취는 제게 끈기를 길러주기도 했어요. 문제가 풀리지 않을 때 마냥 열받아 하기보다는 왜 안 되지? 하며 고민부터 하는 태도가 생겼는데, 이 태도는 사람을 만날 때나 업무를 대할 때나 톡톡히 도움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여전히 프로응원러의 포지션인데요. 저처럼 키 작은 분들이 제가 하는 걸 보고 따라하거나 동작을 물어보더라고요. 그들의 도전하는 모습을 보면서 타인에게 용기를 줄 수 있다면, 두세 번 가야 하는 내 키 정말 좋아, 오히려 좋아! 싶더라고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던 제가 이제는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 수 있는 사람이 된 것만 같아서요.


처음 큰 좌절감을 안겨준 제 짧은 리치가 지금은 좋아졌습니다. 남들보다 느리게 가도, 남과는 다른 보폭이어도 꽤 괜찮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걸 알게 해줬거든요.


혹시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 자신의 걸음이 너무 느리거나 제자리걸음인 것 같나요? 제 이야기를 통해 전하고 싶었던 말은 그거예요. 발걸음이 느려도 앞을 향해 꾸준히 나아가는 중이라는 걸,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의 느린 전진을 슬로우스타터가 항상 응원합니다.


(사실 이 즐거움은 클라이밍을 한다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데, 저는 키가 작아 그 즐거움이 배로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니 이 글을 끝까지 읽어준 고마운 분, 우리 함께 안전하고 즐겁게 클라이밍 해볼까요!)




"클라이밍 에세이를 보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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