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글쓰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느 Nov 29. 2023

Day 4

나는 다전입니다 (4)

상자 안에 있는 물건을 꺼내 바닥에 정갈하게 놓았다. 다전은 기록을 남겨놓을 요량이었다. 자신의 첫 하프 마라톤이므로. 하프를 나가겠다고 다짐했던 그때의 마음과 의미를 언제고 꺼내볼 수 있도록. 그 전에 바닥을 물티슈로 한번 깨끗하게 닦아내기도 했다. 머리카락이나 먼지가 보이면 SNS에 사진을 업로드했을 때 창피를 당할 수도 있으니. 물건들을 든 다전의 손이 분주히 움직였다. 주황색의 배번호가 가운데에 오도록 하고 그 외의 기념품이 주변을 둘러싸도록 했다. 고심해서 찍은 만큼 나름 연출한 흔적이 엿보이는 사진을 얻었다. 다전은 마음에 드는 사진 몇 장을 골라 다정에게 전송했다. 다음 주에 같이 연습할래? 다정에게 물었고, 그는 짤막한 대답과 함께 엄지를 치켜드는 캐릭터 이모티콘을 보내왔다. 콜!



1:33:40

6’50’’/KM

15.478KM


외근을 다녀온 다전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클라이언트와의 미팅에서 처음 협의한 것보다 더 큰 예산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초반에 제시한 전략을 토대로 광고를 제작해 노출했더니 대중에게 기업 이미지가 좋아졌다는 결과를 얻었다고 했다. 이후의 사업에 더 투자해보기로 했다는 클라이언트의 말에 다전은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가 말한 대부분의 전략은 다전이 밤낮을 새워 가며 연구한 내용으로 짠 것이었다. 미팅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갈 때도 평소 같으면 차가 막혀 오래 걸렸을 길이 유난히도 텅 비어있었다. 막힘없이 쭉쭉 나아가는 버스 안에서 다전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창문을 열었다. 푸르게 빛나는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뛰기 좋은 날씨였다. 오늘은 순탄한 하루인 것 같다고, 다전은 생각했다.


근데 진짜 무슨 뜻이에요? 업무를 시작하기 전에 들른 탕비실에서 이 대리와 마주쳤다. 그들은 서로 가볍게 눈인사를 주고받으며 팬트리 선반 앞에 나란히 섰다. 다전은 서랍에서 커피믹스를 꺼냈고, 이 대리는 컵 정리함에 들어있는 머그잔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을 받을 때 이 대리가 던진 질문이었다. 입사 오티 때부터 사실 조금 궁금하긴 했다고 그가 말했다. 근데 친해지지도 않았는데 처음 만난 날 대뜸 물어보기엔 또 좀 조심스러워서. 다전과 이 대리는 입사 동기였다. 어릴 적 짓궂은 친구들은 가나다라 표 같다고 놀려댔는데 성인이 되어 만난 사람들은 확실히 다르다. 자신의 이름을 들으면 고개를 갸웃거리고 물음표로 가득한 표정을 숨기지도 못하면서. 팀장처럼 격의 없이 말하는 사람을 만난 일이 그만큼 오랜만이었다. 다전은 커피 포장지로 물을 휘휘 저으면서 살짝 웃었다. 원래는 다정이었대요, 제 이름. 으잉?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 대리가 우스꽝스러운 소리를 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이. 어, 아니. 그러면 진짜 왜 개명 안 해요? 부모님이 잘못 신고한 거예요? 다전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김을 후후 불어 커피를 식히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지어주신 이름이에요. 근데 말이 좀 느리셔서. 아버지가 오해한 채로 출생신고서에 이름을 썼대요. 큰 뜻은 없어요. 말을 마친 다전은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대답하면서 그녀의 엄마를 생각했다. 말도 행동도 느려서 주변에 곧잘 눈총을 받곤 했던 엄마. 그렇게 느려터졌으면서 사라지는 건 또 빨랐던 엄마. 설탕이 잔뜩 들어간 커피가 달고도, 썼다.


(8매)

매거진의 이전글 Day 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