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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은샘 May 01. 2022

사람들의 마음에는 강이 흐른다

교사들은 알고 있다. 교사가 사용하는 언어가 아이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을. 가능한 아이들 입장에서 쉬운 언어로,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하려고 교사들은 많이 노력한다.


어떤 아이는 한 번에 알아듣고, 어떤 아이는 열 번을 말해도 못 알아들을 때가 있다. 이렇게 다양한 아이들을 마주하며 교사들은 누구를 기준으로 말해야 하나 고민하게 된다.     


언어의 강도도 그렇다. 어떤 애는 ‘뭐야, 이걸 못했다고?’ 묻기만 해도 눈물을 글썽이고, 어떤 애는 작정하고 소리를 높여 야단을 쳐도 꿈쩍도 안 한다.

이럴 때 교사는 갈등한다. 나는 어떻게 말해야 하나? 어떤 말을 써야 하나?     


이기주 작가의 『말의 품격』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사람의 마음에는 저마다 강이 흐른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말이 우리의 귀로 들어오는 순간 말은 마음의 강물에 실려 감정의 밑바닥까지 떠내려온다.    


마음속에서 명령과 질문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 명령이 한쪽의 생각을 다른 한쪽에 흘려보내는 ‘치우침의 언어’라면, 질문은 한쪽의 다른 생각이 다른 쪽에 번지고 스며드는 ‘물듦의 언어’다. 질문 형식의 대화는 청자(聽者)로 하여금 존중받는 느낌이 들게 한다. 때에 따라 듣는 이의 자발적 참여를 끌어내기도 한다.    


나는 질문 형식의 대화를 많이 하고자 했다. 한 반에 30명이 넘는 아이들에게 질문을 하면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대답 때문에 정신이 없을 때도 있다. 그럴 때 아이들은 나 대신 대답을 해 주고, 서로에게 질문을 하기도 한다. 그럴 때 우리는 강물처럼 마음이 같이 흘러감을 느꼈다.


문득 몇 년 전 입학식장에서 만난 교장선생님이 떠오른다. 그분은 반 아이들이 아니라 입학식 날, 처음 만난 수백 명 입학생들과 바로 그런 질문의 언어를 사용한 분이었다.      


입학식을 하러 체육관에 모인 일학년은 모두 12반이었다. 8백 명이 넘는 학생학부모가 체육관에 꽉 찼다. 일 학년 입학생들은 새들이 지저귀는 것처럼 종알종알 이야기를 했다.  입학식을 시작하겠다고 하자 그제서야 새침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애국가를 부르고 교장선생님이 축하 인사를 했다. 보통 교장선생님들은 일방적인 축하 인사를 하고 내려오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이 교장선생님은 천천히 아이들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여러분, 입학식 하는 날인데 기분이 어떤가요?”

첫마디를 이렇게 묻자, 수백 명 입학생 아이들이 순간 조용하더니 한 두 명 입을 열기 시작했다.

“신나요.”

“기분 좋아요.”

“무지 기뻐요.”

교장선생님은 아이들이 얘기할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슬퍼요.”

저쪽에서 들리는 작은 목소리를 교장선생님은 노련한 어부처럼 낚아챘다.

“슬프다는 소리가 들렸는데 왜 슬플까요?”

“…….”

뭐라고 말하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교장선생님은 아이들을 향해 기쁜 사람도, 신나는 사람도 있고 슬픈 사람도 있지만 학교에서 새롭게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나면 즐거울 거라고 얘기하며 축하인사를 마쳤다. 거기까지는 그렇구나 싶었다. 그런데 교장선생님은 강단에서 내려와서 곧장 아까 슬프다고 말한 아이를 찾아가는 게 아닌가? 아이 이름을 먼저 묻고 왜 슬펐는지 물었다. 아이는 자기 이름은 지안이고, 같이 유치원에 다니던 아이들은 다른 학교에 갔고, 자기 혼자 이 학교에 와서 슬프다고 대답했다. 교장선생님은 "지안이가 그래서 슬펐구나!" 하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입학생들은 반별로 교실에 가서 담임 선생님을 만나고 반 친구들과 인사를 했다. 한두 시간 후 입학생 아이들이 하교할 때쯤 교장선생님은 현관 앞 포토존에 서 있었다. 환하게 만든 포토존에서 입학생과 학부모들이 기념사진을 많이 찍었다. 아이들이 하교할 때 교장선생님은 잘 가라고 인사를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한 아이를 보고 소리쳤다.

“지안아, 오늘 학교에서 어땠니?”

집에 가려던 아이는 교장선생님을 보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재미있었어요.”

지안이는 교장선생님이 자기 이름을 불러 줘서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이었다.

“교장선생님하고 같이 사진 찍을까?”

이번에는 지안이 어머니까지 행복한 표정이었다. 어머니는 교장선생님과 지안이가 예쁘게 나오도록 사진을 여러 번 찍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내 몸 안에서 깊은 떨림을 느꼈다. 교장선생님은 내가 닮고 싶었던 바로 그런 스승의 모습이었다. 교장선생님의 모습을 보니 얼마나 오랜 시간 아이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쏟았을지가 느껴졌다.

    

질문은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후에 교사는 그 질문의 답을 듣기 위해 기다려야 하고, 솔직한 대답을 하도록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 그냥 인사치레로 묻는 다면 누구보다 아이들이 잘 알고 입을 다물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그 대답을 듣고 나서 다음 행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것 때문에 많이 놀랐다. 입학식에 참여한 그 많은 아이들 중 한 명이 슬프다고 말한 걸 기억하고 찾아가다니!  아이가 왜 슬퍼하는지 묻고, 교장선생님은 지안이에게 소중한 친구처럼 이름을 불러 주고 함께 사진을 찍어주다니! 유치원 친구가 없어 텅 빈 지안이의 슬픈 마음을 제대로 채워 준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는 게 사랑이 아니라, 상대가 원하는 걸 하는 게 사랑이란 걸 깨달았다. 질문은 하는 게 끝이 아니라 그 질문의 솔직한 대답을 듣고, 그 걸 공감하고 함께 있어 주는 게 완성이란 걸 알았다.     

그럴 때 아이들의 굳었던 마음이 양지에 놓인 눈사람처럼 슬며시 녹는 걸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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