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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산

있어야 할 그곳

by 평 화

“모든 걸 털어버리고 와. “


집을 나서기 전, 뒤통수에 날카로운 말이 꽂혔다. 무엇을 털어야 할까. 막상 그 앞에 서니 내가 껴안고 있던 것들이 많았다. 텅 빈 악보에 쉼표 하나가 덩그러니 놓인 듯했다. 어디서 어떻게 그려나가야 할까. 푸른 숲은 내 숨을 열어젖히고, 그 속에서 무엇을 놓고 왔는지 떠올리게 했다.



1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여기저기 다녀볼까.


목적지를 정하고

한 곳에 오래 머물러볼까.


바다와 산이 존재하고

여름이니 참 푸르겠구나.



오랜만에 기차를 탔다. 평일임에도 빈좌석을 보기 어려울 만큼 꽉 찼다. 다들 어디 가는 것일까. 주어진 시간은 유한했지만, 느리게 가는 무궁화 열차를 선택했다. 이 시간을 좀 더 누려보고 싶은 어리석음이 이유다. 지루함 속에서 보이는 풍경은 아름다웠다. 저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상상하며, 세상은 한눈에 담을 수 없을 만큼 모든 것이 크고 광활함을 느꼈다.



2

쉼표는 늘 필요했다.

누군가에게 들었던 말인지,

내 안의 목소리인지 알 수는 없었다.


그리운 이, 향이 가득한 곳.

그곳을 향해 가는 중이다.


바다는 너무 광활해 혼자인 내가 외로울 것 같아서,

졸졸졸- 흘러가는 시냇물 소리로 마음 한 켠을 채웠다.



씻을 수 없던 것들이 씻겨가길 바랐다. 내 안에 존재하던 검은 것들을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말이다. 시냇물은 너무도 맑았고, 어떤 마음인지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을 만큼 투명했다. 그 안에는 나와 같은 검은 것들이 조용히 떠다녔다. 나는 꽁꽁 숨기기 바쁜데, 너는 나와 다르구나.



차디찬 물에 발을 담가볼까.

짧은 신음이 절로 나올 만큼,

끊겨있던 무언가가 -

다시 연결되는 것 같다.



3

맨발로 집까지 걸어갔다. 날이 아직 저물지 않았는데도, 고요하다. 이 세상에 나 혼자 살아남은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처벅처벅- 물에 불은 발소리가 더 잘 들리기 때문일까. 저녁놀이 오묘한 빨간색이라 그럴까. 여름이라 그럴까.


“맨발로 걸으면 건강해진댜.“


그녀가 걷던 거리엔

황토가 아닌 자갈과 모래로 가득했다.

그래서, 별 의미 없을 것 같았다.


행여 생채기라도 날까

몇 번이나 말려봤지만

어린 녀석의 말을

들어줄 리 없었다.


그렇게 얻어진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때의 나로선

알 수 없었다.



지금에서야 걸어보니, 자갈과 모래는 굳어있던 발의 피로를 풀어주는 당신의 벗이었단 것을. 깨끗하게 씻겨진 발이 자갈과 모래에 뒤덮였대도, 여름의 땅은 참으로 따뜻했다.


그것들이 남긴 흠집들은 작은 쉼표였고, 그 쉼표 위에서 나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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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