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흔적
1
"아가, 문 열어 봐라!"
마당으로 쏟아지는 햇살 위로
큼지막한 수박 한 덩이가
넝쿨째 들어오네.
"다 먹어. 먹을 수 있어. 니 할매는 수박 한 통 다 먹었어!"
손사래를 쳐 봐도 소용없었다. 여산에서는 '황소고집'이란 말이 순이 할머니를 위해 생긴 줄 알 정도였다. 묵직한 수박을 들고 마루로 향했다. 나의 여름은 이 수박 한 덩이로 시작될 모양이다.
2
칼이 어떻게 들어가느냐에 따라 수박 속을 알 수 있다.
중간쯤까지 썰었을 때, 시원한 소리를 내며 쩌억- 갈라졌다. 탐스럽고 발갛게 익은 속살은 마치 웃는 얼굴 같았다.
포크로
콕- 찍어 먹는 것보다
두 손으로 들고
베어 무는 게
여름 맛이니까.
손등을 타고 흐르는 붉은 물은, 여름이 내게 남기는 흔적이었다. 어린 날 할머니가 곁에 뒀다 닦아주던 그 맛.
그 맛은 혼자여도 외롭지 않은, 순이 할머니의 정이었다.
한 조각을 맛보았을 때
그제야 깨달았다.
어쩌면 내가 맛본 것은
여름이 아닌, 그리움이었음을.
그 그리움 위로,
나비가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