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언제나 대충 살고 싶다
애써 불행해질 필요는 전혀 없다.
터널 속에서 빛 하나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힘들고 슬프고 아프고
끝내 망하게 되었어도
억울할 이유 하나 없다.
삶은 언제나 우릴 배신하니
그게 바로 인생의 본질이니.
낙망할 필요도 전혀 없다.
삶은 원래 매정한 편이나,
인생은 긴 법이라
언젠가 빛에 닿게 되리니.
드물게 찾아오는 운이라는 손님이
그간의 고생을 모조리 덮어버릴 테니.
그러나 이 말은
목적지를 향해 전심으로 달리던,
혹은 달려가는 이에게나 해당된다.
꿈이 그저 ‘돈 많은 백수’쯤 되는 이에게는
이 말이 닿지 않길 바란다.
오직 시원한 헬스장에서 흘린 땀방울에만
가치를 두는 이에게 어찌 이 이야기가 유용할까?
듣기 좋다는 이유만으로
아무렇게나 끼워 맞추면 안 되는 말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푸시킨의 감미로움에 빠지곤 한다.
그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면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간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아니,
우리는 분노해야 한다.
분노해야만 한다.
거짓말쟁이에게 그대로 당해버린
스스로에게 분노해야만 한다.
아직도 삶을 원망하는 것에 대해서.
누군가를 탓하려는 마음에 대해서.
여태까지 아무것도 한 게 없는 자신에게
왜 이것밖에 안되었느냐고,
이 각박한 세상을
저들은 저렇게나 잘 살고 있는데
왜 나는 구석에 처박혀 징징대고 있느냐고.
정녕 부끄럽지 않은가?
나는,
생각만 해도
낯이 뜨겁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지금의 현실이 창피한 게 아니라,
그 이유를 자꾸만 다른 데서 찾고 싶은 그 마음이
너무나 수치스럽지 않나?
그와 동시에, 가슴 깊이 이해하기도 한다.
세상은 정말 불공평하거든.
온 힘을 다해 기어가는 나보다
대낮에 하품하는 저이의 하루가
더 달콤하기도 하니.
나의 필사적인 꿈틀거림이
배를 긁적이며 한가로이 입을 가리는
저 손바닥보다 못나 보일 때면,
깊은 산골짜기에 들어서
한바탕 소리라도 지르고픈 충동이 솟구치곤 하니까.
그래, 정말 참지 못하겠다면 마음껏 표출해도 좋다.
단, 다른 이에게 결코 불편을 주지 않겠다면.
이렇게 해서 응어리진 마음이
조금이라도 풀어진다면
그 자체로 긍정적일 테지만,
또한 이 미움이 얼마나 부질없는지도
깊이 이해하고 있거든.
스스로 불행해질 필요 전혀 없다.
그러나 ‘어떻게든 되겠지’, ‘누군가는 해주겠지’
낙관하지 말아라.
존재하는 모든 명문(明文)은
대충 숨 쉬는 이에겐
결코 허락되지 않으니.
그렇다면 나는,
상관없는 옆길에 눈을 두지 않으련다.
여전히 비틀거리지만,
오로지 내딛는 발걸음에 책임을 올리련다.
그래서
솔직히 많이 쓰리겠지만
실패해도 괜찮다.
망해버린대도 괜찮다.
슬픔은 그때뿐.
그 어떤 것도 결국엔,
일상으로 귀결될 테니.
그래서 묻노니
당신은, 어떻게 살아내려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