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에스컬레이터에서 문득
2주 동안 교육을 듣게 되었다. 덕분에 직장을 벗어나 오랜만에 집에서 출퇴근이라는 걸 해보았다. 기상시간은 1시간 빨라졌지만 상관없었다. 집에서 출퇴근한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다.
주변에 사람이라고는 사택 사람들밖에 없었던 곳을 벗어나니 활기찬 아침 출근 풍경이 펼쳐졌다. 아침에 나 혼자서 외롭게 출근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 다른 직장인들 다 같이 하루를 시작한다고 생각하니 뭔가 낯선 이들에게서 동지애가 느껴졌다. 비록 '활기찬'이라고 생각한 순간은 아주 짧게 끝나버렸지만. 사람이 많아서 활기차다고 느껴졌을 뿐 그들의 표정은 피곤하고 지쳐 보였다. 그래, 출근길이라는 건 혼자든 함께든 다 똑같구나.
교육원으로 갈 때 지하철 환승을 한 번 해야 한다. 그때 타는 에스컬레이터는 길이가 엄청 길다. 너무 길어서 에스컬레이터 꼭대기가 안 보일 정도고 경사도 너무 급해서 자칫 발을 헛디디면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다. 처음 타서 맨 위까지 도착하려면 3분 정도는 타야했다.
아침 출근 시간에는 사람들이 이 에스컬레이터를 탄 후 가만히 서 있지 않고 계단을 오르듯이 바삐 걸어 올라간다. 그 뒤의 사람도, 그 뒤의 뒤의 사람도 마찬가지다. 보통의 에스컬레이터처럼 두 줄을 설 수 있는 넉넉한 가로넓이의 사이즈도 아니다. 두 사람이 딱 붙어 서있으면 알맞은 정도의 넓이인데 사람들이 모두 한 칸 한 칸 걸어 올라가니 아무도 그 자리에 멈출 수 없다. 모두들 앞의 사람을 따라 행렬을 이루고 있었다.
나도 그들 뒤를 따라 에스컬레이터를 걸어 올라갔다. 하지만 보통의 에스컬레이터가 아니듯, 걸어도 걸어도 끝이 나지 않았고 한참을 걸어 올라왔을 때쯤 고개를 들어보면 지하에서 지상 0층으로 올라온 것이 다였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라 한 층 정도 더 올라가야 환승 열차를 탈 수 있는 곳이 나온다. 이토록 긴 에스컬레이터라니! 다 오르고 나면 아침부터 등산을 한 듯 숨이 가빠지고 목이 탄다. 이런 출근길을 예상한 건 아니었는데.
‘모두들 열심히 에스컬레이터를 걸어 올라가는데 나 혼자 멈추면 이상할 거야. 내 시간은 넉넉한데도 멈추면 뭔가 뒤처진 기분이 드는걸? 다들 어디까지 가길래 이렇게 급한 걸까? 숨이 차는데 잠깐 멈춰도 되겠지? 아 뒤에 사람들이 계속 올라오네. 그냥 걸어가야겠다.’
그때 문득 아침마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벌어지는 이 기나긴 등산 행렬이 우리의 인생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뒤쳐지기 싫어해서 앞사람을 무작정 따라가는 모습 같았다. 앞사람, 뒷사람과 엎치락뒤치락 경쟁을 하며 중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졸업한 그들은 이렇게 다시 또 출근길에서 만났구나.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의 호흡을 고르고 여유를 가질 수도 있지만, 앞서 나가는 그들을 헉헉대며 따라갈 수밖에 없구나.
며칠을 그렇게 아침부터 숨 가쁘게 등산 아닌 등산을 하다가 어느 날 에스컬레이터를 타자마자 제일 오른쪽에 자리를 잡고 멈추어 섰다. 처음부터 걸어 오르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다른 사람들은 줄을 지어 왼쪽으로 걸어 올라갔다. 나 혼자 멈춰서 있었는데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았다. 남들이 우르르 다 하니까 나도 따라 했는데 실제로는 따라 하지 않아도 그냥 내 페이스대로 멈춰 서 있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괜찮았다. 몇 분 후 그들을 승강장에서 마주할 수 있었다. 그리고 타이밍 좋게 열차가 도착했다.
살다 보면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지나쳐 바삐 올라가는 것처럼 보여 조바심이 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들을 무작정 따라가다 보면 앞뒤 꽉 막힌 무리에 휩쓸려 계속해서 앞만 보고 걸어 나가야 될 수도 있다. 이 길이 맞는 길인가 생각할 틈도 없다. 뒤에서 우르르 사람들이 밀려오고 있으니.
그때 아무렇지 않게 줄을 벗어나 옆에서 잠시 멈춰보자. 잠깐 멈춰서 숨을 고르고 다시 내 속도대로 걸어 나가다 보면 어느새 목표지점에 타이밍 맞게 도착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무리의 사람들은 말 그대로 철저하게 ‘타인’이어서 굳이 따라가지 않아도 좋다. 나는 내 시간에 맞게, 내 리듬에 맞게 그렇게 움직이면 된다. 출근할 때도, 살아갈 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