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충돌

2024.겨

by sinwolrang
5nFLHVFKDN7csXqYabszZgGozlk.JPG


모두가 잠든 어둠의 시간,

모두가 죽어 있는 신기한 시간,

신에게 맡겨진 무방비(無防備)의 시간,

봉인된 문들이 열리는 꿈의 시간.


새 해 첫눈이 내렸다. 박설(薄雪)이다.

빛들의 무덤을 지나 미망인의 미소처럼

은밀하게 숨죽여 내렸나 보다.


얼음 같은 창문을 연다.

박하사탕 같은 공기가 폭풍처럼 들이친다.


시골집 벽에 걸린 조상들의 빛바랜 흑백 사진처럼,

안개 같은 옅은 박명 속에 별을 이고 잠들었던 동쪽산이 깨어난다.

배고픈 새 두 마리가 먹선을 그으며 우리 쪽 세상으로 날아오른다.

오사카행 비행기가 열도의 수증기를 향해 잿빛 하늘을 가르며 빠르게 사라 진다.


뛰어야 보이는,

느리게 걸어야 보이는 것들.

어둠과 어둠사이를 바스락 거리며 말라가는 빛의 시간들,

영혼이 말라가는 시간들,

시들어 가는 시간들.

징검다리를 건너뛰듯 살다가 잠시 멈춰 서면 보이는 것들.


휴일이라는 빨간색 꼬리표를 달고 잠시 느려지는 시간들,

물컹거리며 깨어나는 감정의 눈들, 익숙하지만 낮선

풍경들.

서쪽 능선을 집어삼킨 햇빛은 빠르게 동쪽으로 달려오고,

동쪽 능선은 녹아내리는 구리화환을 쓰고

상고대를 붉게 물들이며 서서히 흘러내린다.


분자들이 한껏 움츠려든 밀도 낮은,

기름기 없이 깡마른 겨울의 공기 속에서,

동과 서에서 빛은 서로를 마주 본다.

광선검을 휘두르며 달려오는 빛의 충돌을,

빛의 전투를 바라보고 있다.

빛과 빛이, 그림자와 빛이, 빛과 그림자가,

세상과 또 하나의 세상의 충돌을,

그림자의 멸망을 지켜보고 있다.


문득 그 충돌과 소멸의 시간을 기록하고 싶은 충동이 일렁인다.

수년을 살며 인식하지 못했던 이유를 자문하며......!


08:30 길게 늘어선 서쪽 능선들이 일제히 밝아진다

08:50 버스 정류장 표지판이 번쩍인다.

08:55 마을 아래 교회 첨탑이 번쩍인다.

09:06 이제 삼거리 편의점의 24시간을 지났다, 이제부턴 급경사가 산으로 이어진다, 햇빛은 더 빠르게 움직인다.

09:10 자주 찾는 카페의 유리창들이 번쩍인다.

09:12 동쪽 능선의 햇빛은 느리고 집요하게 연암사의 기와지붕을 태우는 중이다, 태양과 산들의 중력에 의해 휘어진 빛.

09:15 동쪽 낮은 능선사이로 빛이 새어 나와 사선으로 만나는 골짜기마다 빛의 구름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09:17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가 아메리카를 꿈꾸며 잠든 승객들을 싣고 구름 한 점 없는 맹숭한 하늘을 희게 그으며 빠르게 사라진다.

09:20 아랫마을 감나무의 달린 까치밥이 홍보석처럼 반짝인다.

09:24 전열보병(戰列步兵)처럼 들판에 길게 늘어섰던 그림자 군단은 저항 없이 빠르게 무너져 내렸고, 거묵거묵 흩어진 그림자의 시체들을 뒤로하고 햇빛 군단은 마른 들판을 빠르게 거슬러 올라온다.

09:25 성탄용 오색전구를 휘감은 블루엔젤을 지나 프리즘 같은 내방 코너창을 뚫고 무지개 같은 빛을 뿌리고 간다.

09:28 길 건너 기와집 지붕과 홍매화나무 가지에 앉아 깃털을 고르던 작은 새들의 머리 위로 신의 자비의 빛이 쏟아진다.

09:31 마침내 세명선원 자작나무 우듬지 위에서 흰 껍질들을 부수며 거대한 두 빛이 소리 없이 충돌했다. 산 아래의 문명과 산 위의 비문명이 충돌했다, 영원히 하나뿐이 하루만의 빛으로......!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창 밖의 겨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