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 순례자
소읍(小邑)의 재래시장 사거리에 나무 타는 냄새와 함께 목탄이 스친 듯 어둠의 거친 입자들이 깔리기 시작한다. 이따금 노점상인의 고단한 하품소리가 들릴 뿐 거리는 고요하다. 미로처럼 가게들이 늘어선 시장 안은 날 벌레 사체들이 들러붙은 싸구려 간판 조명만이 섬섬히 비출 뿐 대부분의 골목들은 어둑하다. 우리의 허기진 내장처럼 텅 비어있는 어두운 골목길을 돌아 예약해둔 식당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선다. 도축된 각이 쳐진 선홍빛 덩어리들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우릴 노려 보고 있다. 나는 순간 멈칫한다. 빠르게 생각이 흐른다. "겨울 아침 모든 것이 숨죽여 얼어붙은 새벽이었을 거야". "최후변론처럼 절규하듯 억울한 울음소리가 들렸을 거야". "큰 눈망울을 치켜뜨고 낯선 공포를 콧구멍으로 거칠게 내뿜었을 거야". "쿵쿵 피가 돌던 커다란 심장을 가진 온순한 생명이었을 거야". 한 때 생명이었던 것은 복수를 품은 냉소처럼 붉게 번들거리는 쇼케이스 안에서 마지막 소멸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머뭇거림이 있었을 뿐, 우리는 세렝게티 초원의 굶주린 늙은 숫사자였다. 잡식성인 우리에겐 그저 조금 특별한 저녁 식사일 뿐이었다. 불판 위 선홍빛 생명의 흔적은 단 몇 초 만에 말라죽은 나무처럼 뻣뻣하게 색을 잃은 채 우리 위장 속에서 소멸되었다. 별 의미 없는 대화와 웃음, 딱히 간절할 것 없는 건배사, 힘줄이 듬성 박힌 고기를 오래 씹을 때 찾아오는 짧은 정적, 텔레비전 뉴스를 보며 탄식과 함께 씹었던 쓴맛나던 고기 조각들.....! 육식의 거만한 포만감이 몰려올 때 쯤, 폐점 시간을 막 넘겨 바람의 검은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그가 들어와 있었다.
[ dessin ]
겨울 까마귀처럼 검게 반질거리는 머리카락.
햇빛에 그을린 성실한 이의 얼굴색.
피곤한 듯 살짝 늘어진 눈거플
작지만 단호함으로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
순한 눈매와 숫을 문지른 듯 흑 검은 눈썹.
총명해 보이는 둥글 납작한 귀.
수줍은 듯 그늘진 콧날과 콧부리.
확신에 찬 두툼하고 푸르스름한 입술.
고단함이 배어있는 옴팡진 뺨.
들개처럼 강인해 보이는 각진 턱선.
정직해 보이는 굵게 곧추선 목.
허옇게 각질이 일어난 벌겋게 튼 손.
검은색 패딩과 검은색 35L 배낭.
두께감이 있어 보이는 감색 트레이닝 바지.
꼬질하지만 튼튼하고 질겨보이는 검은색 운동화.
운명처럼 30년 전 후줄근했던 나와 그가 이곳에서 만났다.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익숙한 듯 배낭을 내려놓고 주위를 빠르게 둘러본다. 마른침을 삼킨다. 추위에 붉게 상기된 목덜미에서 밤톨만한 목젖이 해처럼 움찔 솟았다 가라앉는다. 그의 피곤한 눈과 나의 호기심 가득한 눈이 빠르게 스친다. 이내 잇몸을 드러내 웃으며 주인과 눈을 마주친다. 메뉴판과 물 잔을 들고 그에게 다가온다. 2인분의 고기를 주문하는, 재차 확인하는 그들의 대화가 내 귀에 날아와 꽂힌다. "누가 또 오려나!" 생각하며 잠시 그를 잊고 질긴 힘줄을 느리고 차분하게 씹는다. 맛이 빠져버린 힘줄을 뱉어 내 휴지에 싸 버리며 주위를 둘러본다. 여전히 그는 혼자이다. 2인분의 고기가 조급하게 구워지고 있다. 잠시 후 굶주린 들개처럼 강인한 턱뼈와 상아 빛 치아는 저작의 음률을 타고 마치 누군가와 대화하듯 단호하게 움직인다. 그의 허기진 눈은 익거나 핏기가 남은 고기조각을 굿이 구분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쫏기 듯 조급하다. 고개 한 번 들지 않고 테이블에 놓였던 음식을 모조리 해치운다. 마침내 허기가 가신 듯 미간의 주름들이 서서히 펴지며 원래 서글한 인상으로 되돌아온다. 고개를 돌려 조용히 주위를 돌아본다. 나와 또다시 눈길이 마주친다. 이번엔 서로의 눈을 피하지 않는다. 포만의 여유와 육식의 동질성으로 이미 우리는 서로에 대해 관대하다. 어색한 웃음이 그와 나 사이에서 반짝하고 부딪치며 빛난다.
서글한 눈인사를 나에게 보내며 일어선다. 순례자의 남루함과 수 많은 상념이 뒤엉켜 있을 35L 배낭을 다부져 보이는 어깨에 가볍게 둘러멘다. 몸을 돌려 카운터로 걸어간다. 가게 주인과 대화가 이어진다. 몇 마디 말들이 오가고 탄성과 웃음소리가 들린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쫑긋해 보지만 소음 섞인 말들은 알아들을 수 없다. 그가 떠났다. 들어올 때와 다르게 확신에 찬 쿵쿵거리는 발걸음으로 칼바람을 가르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우리의 호기심 어린 표정을 읽은 듯 가게 주인은 만면의 미소를 지으며 우리에게로 다가온다. "그 청년이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아세요? 글쎄~ 국토순례 중이랍니다". 우리는 "와~ " 맞장구를 치며 이 새로운 얘깃거리로
한참을 소란했다. 그는 인천에서 동해까지 국토의 허리를 가르는 323.9KM 길이의 42번 국도를 걸어서 횡단하고 있었다. 하루에 40KM 정도를 걷는다고 한다. 한 열흘정도 걸릴 거라고....., 지금 나흘째 걷고 있다고..., 잠은 모텔이나 민박집에서 잔다고..... 그 이상의 정보는 없었다. 분명 무슨 사연이 있을 거라고 추정할 뿐 서둘러 결론짓지 않는다. 어둠 속에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이 마음에 덜컥하고 걸린다. 후회와 아쉬움의 파장이 조용히 일렁인다. 소주 한잔, 음료수 한 병 건네며..... "힘을 내라고~", "반드시 해 낼 거라고~", "마음이 단단해질 거라고~", "상황이 나아질 거라고~", " 잊혀질 거라고~",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라고~", 진정 정감 있는 오지랖을 떨 수 있었을 텐데....!
나와 헤어진 이곳부터 태백산맥 능선을 넘을 때까지 오르막이 이어질 것이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보다 더 힘든 길이 그에게 남아 있다. 하지만 난 의심하지 않는다. 뒤돌아 나가는 그림자에 어른거리던 단호한 표정과 젊은 열정으로 반짝이던 눈동자를 보았기 때문이다.
신새벽, 뜨거운 자판기 커피를 뽑아 두 손에 모아 쥐고, 얼어붙은 겨울바다를 뚫고 올라오는 붉은 태양을 바라보고 있을 그를 생각한다. 나는 주문을 외 듯 조용히 중얼거린다.
당신이 누군지 모르지만 행복하시길~ 그리고 지금의 나와 당신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