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대한 短想

흰_한강

by sinwolrang

책을 덮는다.

잠시 눈을 감는다.

들숨과 날숨을 바라본다.


해가 들지 않는

산으로 난 창

골짝마다 흰 그늘


쉰을 넘겨

흰 것들에 싸여 살았지만

희다는 걸 알지 못했다.


모든 물질과 비물질의 근원은 흰이었을까..! 우리가 인식하는-물질과 관념- 존재의 모든 것이 흰에서 출발하지 않았을까..! 빛의 3원색인 빨강, 초록, 파랑의 빛을 가산혼합하면 흰색이 된다. 더 많은 색의 빛이 가산혼합 될 때 더 밝고 희게 빛난다. 뜨거운 한낮 태양이 가장 희게 타오를 때 그 빛은 -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며 생기는 가시광선의 파장- 세상의 실존을 증명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렬하다. 우리 원시세포는 본능으로 스스로의 기원을 알고 있었던 걸까..! 태초의 흰 빛의 입자 하나가 -우리가 인식하거나 하지 못하는- 모든 것의 시작이었을까..! 그 사건을 가장 또렷이 기억한 원시세포 하나가 물질과 비물질의, 그것을 초월하는 그 무엇의 조상이지 않았을까..! 그러므로 원시세포가 자신의 근원을 기억하는 한 우리는 영원히 흰에 싸여 살아갈 수밖에 없는 걸까..!


지난가을 수확이 끝난 텃밭을 내려다본다. 속이 덜 차 버려진 배추에 흰 서리와 눈이 덮이고 겨울 그 짧은 햇빛에 녹았다 얼었다를 반복하더니, 어느 순간 초록의 색은 사라지고 희멀건 배추가 되었다. 흰은 색을 더하기도 도로 되 찾아가기도 한다. 흰은 비물질인 우리 감정과 생각의 색마저도 물들이거나 퇴색시킨다. 혼령들이 거니는 비이성적 관념의 세계마저도 온통 흰으로 뒤덮여 있다. 우리 영혼에 색이 있다면 흰일까..! 그래서 쉽게 얼룩지고 더러워지는 걸까..! 우리는 흰에서 왔으니 흰으로 돌아가는가! 아니면, 그냥 투명하게 사라지는 가! 우리에게 흰으로부터 도망쳐 숨을 곳은 없는가..! 흰 뼈와 치아, 흰 속옷과 머리카락, 흰 손톱과 부스럼, 그늘진 곳에 쌓여 있는 흰 잔설. 그리고 흰 책 한 권.


영원 어디쯤 흰점 하나

그 속 시작과 끝

그 사이 찰나

순간 들어 선

삶과 죽음

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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