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즈 사강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이끌고 타박거리며 현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방학이라 본가에 내려와 있는 딸아이가 봄 햇살처럼 화사한 인사말로 반갑게 맞아준다.
허겁지겁 허기진 배를 채우고 나서야 종일 무겁게 짓눌렸던 마음과 몸에 조금씩 기운이 올라온다.
저녁 식사가 끝나자 슬금 눈치를 보며 내 얼굴을 살피던 딸아이가 불쑥 책 두 권을 내밀며 한 권을 고르란다.
평소 벽돌 같은 무겁고 딱딱한 책만 읽는 내가 조금은 답답해 보였나 보다.
잠깐 망설임 끝에 녹색광선 출판사에서 양장본으로 펴낸 프랑수아즈 사강의 '실패의 신호'를 골라 잡았다.
'프랑수아즈 사강'이라는 이름에 대한 어렴풋한 기억과 함께 사뭇 비극적 결말을 예고하는 듯한 책 제목에 끌렸던 것 같다.
책을 펼쳐보기도 전에 오렌지색 액자에 담긴 듯한 흑백 사진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길 건너 건물 위로 파리 에펠탑이 살짝 보이는 창가에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 거리를 내려다보는 여인의 무표정한 옆모습과 유리창에 반사된 슬픔에 잠긴 듯 보이는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통속과 예술 사이 그 어디쯤 신비로운 안개에 싸인 섬 같은 소설!
이유 있는 무위도식!
여성작가 특유의 장점인 섬세한 표현과 30대 젊은 나이에 쓴 작품이라고 믿기 어려운 인간에 대한 이해와 통찰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을 외설적 통속 연애 소설로 볼 수도 있겠지만 인간 내면의 고유한 특질들을 돌려 표현하지 않고 솔직하고 자유롭게 표현해 오히려 거부감 없이 읽었던 작품이었다.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에서도 느꼈던 당혹함 뒤에 찾아오는 묵직한 여운이 이 작품에서도 느껴지는 건 두 작가 모두가 인간의 욕망과 한계를 존재의 모순과 불굴의 의지를 같은 시선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첫 봄바람이 불어오는 파리에서 운명처럼 시작된 두 연인의 사랑이 격정의 뜨거운 여름을 지나 가을의 싸늘한 바람과 함께 차갑게 식어버린다.
'루실'은 나이 많은 상류층 남자에 기생해 살고 있다. 그녀는 상류사회의 허영과 가식적인 삶을 무시하면서도 그들의 보호 아래 무위의 삶을 충실히 살아간다. 그러던 중 역시 나이 많은 상류층 여자에게 기생해 살아가는 젊은 '앙투안'과 만나게 된다. 두 젊음은 타오르는 욕망의 본능으로 서로를 알아보며 빠르게 사랑에 빠진다. 그들은 서로를 욕망하며 그동안 그들의 존재와 삶을 지탱해 주었던 상류사회를 떠나 평범한 세상 속에서 서로의 사랑이 영원하기를 바라며 뜨겁게 사랑을 불태운다. 하지만 뜨거웠던 여름이 지나자 '루실'은 '앙투안'과의 사랑과 자기 내면에 꿈틀거리는 무위의 삶을 향한 열망 사이에 갈등한다. 언제나 자기 내면의 소리에 충실했던 '루실'은 자신이 정말 원하는 삶이 '앙투안'과의 뜨거운 사랑이 아닌 무위의 삶임을 깨닫고 결국 '앙투안'과 이별을 선택한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투지적인 무위의 삶을 보장받을 수 있는 상류사회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2년 뒤 '앙투안'역시 세상적 출세를 통해 자신이 그토록 경멸하던 상류사회로 되돌아온다. 하지만 재회한 두 사람에겐 그 어떤 감정도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이렇게 그들의 뜨거웠던 일탈은 결국 허무함과 처절한 실패로 끝나고 만다. 그들의 사랑은 시작부터 이미 '실패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루실'과 '앙투안'의 모순되고 이기적인 삶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이 소설을 읽으며 양귀자 작가의 '모순'이 떠올랐다.
소설 '모순'속 주인공 '안진진'이 선택한 모순적 삶은 이기적인 선택이 아닌 결국 가족에 대한 사랑과 어머니에 대한 존경에서 비롯된 자기희생적 모순이었다면, '루실'의 모순된 삶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그 무엇에도 구속되지 않고(사실은 돈에 종속되었지만) 무위를 원하는 자기 내면과만 충실한 관계를 유지하려는 비이성적 상태이며, '앙투안'의 모순된 삶의 모습은 인간 속성에 녹아 있는 허영과 욕망을 잘 투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한 번쯤 무위의 삶을 살아보고 싶을 때가 있다. 매일 반복되는 지리멸렬한 삶과 경제 사회적인 모든 관계의 얼개를 벗어버리고 자유로운 삶을 살아보고 싶어 한다. 나 또한 무위의 삶을 동경하지만 현실에서 무위의 삶은 철저한 자기 책임이 뒤따른다. 그래도 그런 삶을 살고 싶다면 '루실'처럼 처절히 자신을 알아내야 하는 고통을 감내해야만 한다.
무위의 삶을 넘어 무위도식의 삶을 살아보고 싶다.
하지만, 나 스스로 그 삶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은 자명하다.
그래도 한 달 아니면 일주일.... 단 하루만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