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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livia Oct 29. 2020

트리니닷

부족함을 장점으로 봐주는 사람

저널리즘 이론과 기본 과목을 무사히 마치고 2학년에 올라오니 TV, 라디오 방송 실습수업이 기다리고 있었다. 직접 뉴스를 만들고 편집, 녹음까지 하는 수업이었다. 그렇기에 문장력과 더불어 말하기가 큰 중요도를 차지했다.


‘트리니’라고 불리는 트리니닷 교수는 지역 라디오에서 직접 뉴스를 만드는 기자로 이번 학기 처음으로 초빙 강사를 맡게 됐다. 그는 첫 수업에 의지가 타오르는 것이 보였고, 친절했으며 학생 한 명 한 명에게 정확한 피드백을 주려 노력했다.


나는 라디오 수업이 싫었다. 라디오에 관심도 없었고 바른 문장력을 갖추는 것도 버거운데 발성, 발음 교정과 특유의 스페인 앵커 톤까지 연습해야 했기 때문이다. 매시간마다 직접 스크립트를 쓴 후 녹음실에 앉았다. 마이크에 대고 서툰 스페인어를 읊으면 모든 이들이 내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었다. 


트리니는 나에게 피드백을 주기 쉬웠을 것이다. 그는 나에게 항상 같은 얘기를 했다.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라디오 뉴스 연습을 하는 것 자체에 큰 메리트가 있는 것이라고. 트리니는 나를 기특하게 여겼지만 동시에 버거운 수업을 들어야 하는 점을 안타까워했다.


발성 연습을 한 날이었다. 그렇기에 직접 기사를 쓰는 것 대신 트리니가 만들어 놓은 스크립트를 갖고 방송 스킬을 익혔다. 발성, 호흡의 맺고 끊음, 적절한 강세와 목소리 톤 등을 연습했다. 나는 어떤 내용의 기사인지 파악하지 못한 채 녹음실에 앉았다.


긴장되는 마음을 다잡고 한 글자씩 읽어 내려갔지만 난생처음 보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당황한 나머지 그 부분을 더듬었다. 심지어 그 문장 전체를 말도 안 되는 톤으로 읽어버렸다. 다음 글자를 읽으려 호흡하는 그때, 내 바로 뒤에 앉아 있던 동기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비웃는 소리. 그중엔 1학년 첫 수업 날 나를 빤히 바라보며 신기해하던 이도 있었다. 그들은 내 녹음이 끝날 때까지 숨을 참으며 웃었다. 그들은 웃음소리가 세어 나가지 않게 노력했다. 하지만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내 신경은 온통 시각이 아닌 청각으로 쏠렸다. 내가 무슨 글자를 읽는지도 모르는 채 나는 내 녹음이 끝날 때까지 그들의 웃음소리만 듣고 있었다.


잘못 들었겠지, 하고 넘기고 싶었다. 그런데 수업이 끝나고 친구들이 도리어 화를 냈다. 본인들도 잘하지 못하면서 왜 웃고 있냐고 그들에게 한 바가지 욕을 쏟는 친구들 앞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절대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내 앞의 벽을 실감했다.


이후 전 세계에 ‘팬데믹’이 선언되고 우리 학교 역시 남은 일정을 온라인 수업으로 진행했다. 라디오 녹음을 온라인으로 하기 쉽지 않았지만 우리에게 별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시험 전 마지막 조별 과제를 앞두고 트리니는 나를 걱정했다. 그는 나에게 자신감 있게 내뱉으라는 말과 몇 가지 조언을 건넸다.


온라인 수업의 장점이자 단점은 모든 이들이 내 목소리를 선명하게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진심 어린 조언을 건네는 트리니에게, 나를 비웃던 동기들에게 보여줘야만 했다. 마지막 녹음을 앞두고 새벽까지 연습을 이어갔다. 내 목소리를 녹음하고, 듣고, 다시 녹음하고 고치는 과정을 반복했다. 잠들기 전 시간을 확인하면 언제나 새벽 세 시가 넘어 있었다.


마지막 녹음 당일, 떨리는 목소리를 붙잡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다행히 연습한 대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3분이 조금 안 되는 녹음이 끝나고 트리니는 내게 처음으로 “기특하다”가 아닌 “축하한다. 정말 잘했다”는 말을 건넸다. 그 한 마디에 왜 그렇게 눈물이 났는지 모르겠다. 트리니는 나의 부족함을 장점으로 보면서 내가 남들과 동등한 실력을 갖추길 바랐다. 완벽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내 앞에 버티던 벽을 조금 허문 기분이었다. 한 번 벽을 허물자 언젠가 완전히 없앨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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