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족함을 장점으로 봐주는 사람
저널리즘 이론과 기본 과목을 무사히 마치고 2학년에 올라오니 TV, 라디오 방송 실습수업이 기다리고 있었다. 직접 뉴스를 만들고 편집, 녹음까지 하는 수업이었다. 그렇기에 문장력과 더불어 말하기가 큰 중요도를 차지했다.
‘트리니’라고 불리는 트리니닷 교수는 지역 라디오에서 직접 뉴스를 만드는 기자로 이번 학기 처음으로 초빙 강사를 맡게 됐다. 그는 첫 수업에 의지가 타오르는 것이 보였고, 친절했으며 학생 한 명 한 명에게 정확한 피드백을 주려 노력했다.
나는 라디오 수업이 싫었다. 라디오에 관심도 없었고 바른 문장력을 갖추는 것도 버거운데 발성, 발음 교정과 특유의 스페인 앵커 톤까지 연습해야 했기 때문이다. 매시간마다 직접 스크립트를 쓴 후 녹음실에 앉았다. 마이크에 대고 서툰 스페인어를 읊으면 모든 이들이 내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었다.
트리니는 나에게 피드백을 주기 쉬웠을 것이다. 그는 나에게 항상 같은 얘기를 했다.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라디오 뉴스 연습을 하는 것 자체에 큰 메리트가 있는 것이라고. 트리니는 나를 기특하게 여겼지만 동시에 버거운 수업을 들어야 하는 점을 안타까워했다.
발성 연습을 한 날이었다. 그렇기에 직접 기사를 쓰는 것 대신 트리니가 만들어 놓은 스크립트를 갖고 방송 스킬을 익혔다. 발성, 호흡의 맺고 끊음, 적절한 강세와 목소리 톤 등을 연습했다. 나는 어떤 내용의 기사인지 파악하지 못한 채 녹음실에 앉았다.
긴장되는 마음을 다잡고 한 글자씩 읽어 내려갔지만 난생처음 보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당황한 나머지 그 부분을 더듬었다. 심지어 그 문장 전체를 말도 안 되는 톤으로 읽어버렸다. 다음 글자를 읽으려 호흡하는 그때, 내 바로 뒤에 앉아 있던 동기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비웃는 소리. 그중엔 1학년 첫 수업 날 나를 빤히 바라보며 신기해하던 이도 있었다. 그들은 내 녹음이 끝날 때까지 숨을 참으며 웃었다. 그들은 웃음소리가 세어 나가지 않게 노력했다. 하지만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내 신경은 온통 시각이 아닌 청각으로 쏠렸다. 내가 무슨 글자를 읽는지도 모르는 채 나는 내 녹음이 끝날 때까지 그들의 웃음소리만 듣고 있었다.
잘못 들었겠지, 하고 넘기고 싶었다. 그런데 수업이 끝나고 친구들이 도리어 화를 냈다. 본인들도 잘하지 못하면서 왜 웃고 있냐고 그들에게 한 바가지 욕을 쏟는 친구들 앞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절대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내 앞의 벽을 실감했다.
이후 전 세계에 ‘팬데믹’이 선언되고 우리 학교 역시 남은 일정을 온라인 수업으로 진행했다. 라디오 녹음을 온라인으로 하기 쉽지 않았지만 우리에게 별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시험 전 마지막 조별 과제를 앞두고 트리니는 나를 걱정했다. 그는 나에게 자신감 있게 내뱉으라는 말과 몇 가지 조언을 건넸다.
온라인 수업의 장점이자 단점은 모든 이들이 내 목소리를 선명하게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진심 어린 조언을 건네는 트리니에게, 나를 비웃던 동기들에게 보여줘야만 했다. 마지막 녹음을 앞두고 새벽까지 연습을 이어갔다. 내 목소리를 녹음하고, 듣고, 다시 녹음하고 고치는 과정을 반복했다. 잠들기 전 시간을 확인하면 언제나 새벽 세 시가 넘어 있었다.
마지막 녹음 당일, 떨리는 목소리를 붙잡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다행히 연습한 대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3분이 조금 안 되는 녹음이 끝나고 트리니는 내게 처음으로 “기특하다”가 아닌 “축하한다. 정말 잘했다”는 말을 건넸다. 그 한 마디에 왜 그렇게 눈물이 났는지 모르겠다. 트리니는 나의 부족함을 장점으로 보면서 내가 남들과 동등한 실력을 갖추길 바랐다. 완벽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내 앞에 버티던 벽을 조금 허문 기분이었다. 한 번 벽을 허물자 언젠가 완전히 없앨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