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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livia Oct 29. 2020

우리 집

나는 유독 집에 대한 운이 없었다. 발렌시아에선 한 번의 홈스테이, 두 번의 셰어 하우스 생활을 했고 쿠엥카에선 한 번의 셰어 하우스, 한 번의 고생 후에 나만의 안식처를 찾을 수 있었다. 내가 남들과 무던히 살지 못하는 것인지, 운이 없던 것인지 항상 집 때문에 고생을 했다. 그리고 이는 쿠엥카에 와서 극에 달했다.


2018년 9월, 쿠엥카에 처음 온 날 나는 어느 호텔에 2박을 예약하고 집을 보러 다녔다. 발렌시아보다 훨씬 싼 집값 덕에 선택지가 많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애초에 나와 있는 매물이 적었다. 내가 처음 본 집은 침대와 책상이 들어서자 발 디딜 틈 없는 작은 방이었다. 정중히 거절하고 그 집을 나와 두 번째 집으로 향했다. 그 집엔 집주인의 아들 다니엘, 하우스 메이트 한 명이 있었지만 다니엘은 발렌시아에서 직장을 다녀 집에 잘 오지 않는다고 했다. 한두 달에 한 번 집에 오기 때문에 화장실을 혼자서 쓸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 나는 당장 이 집을 계약했다.


와이파이가 없어 내 명의로 와이파이를 등록하고, 콘센트가 고장 나 집주인에게 새로운 콘센트를 받기까지 2주가 넘는 시간이 걸렸지만 나름 만족스러웠다. 나의 쿠엥카 첫 하우스 메이트는 루마니아 할머니 도츠카였는데 쿠엥카의 한 병원에서 일한다고 했다. 도츠카는 쿠엥카가 처음인 나에게 어느 마트가 좋은지 알려줬고, 주말 오전 늦잠을 자려는 나를 깨워 같이 커피를 마시러 나가기도 했다. 그에게서 지난해 마르따의 모습이 잠깐 스쳤다.


도츠카와 지낸 지 한 달쯤 지났을까. 비어 있는 다니엘 방에 새 식구가 왔다. 집주인 일가의 친구로 대학원을 마쳤는데 고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머물 곳이 필요해 잠시 지낸다고 했다. 그때는 그 친구가 내 인생 최악의 시기에 불을 지필 것이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가 집에 온 첫날, 새벽까지 파티를 즐긴 후 친구를 집에 데려왔다. 열쇠가 없던 것인지 취기가 올라 문을 못 여는 것인지 그와 그 친구는 새벽 두 시에 초인종을 쉴 새 없이 눌러댔다. 내 방이 현관문 바로 옆에 있던 탓에 나는 잠에서 깨 문을 열어줘야 했다. 그들은 고맙다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술냄새를 풍기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나는 그 당시 오전 수업을 가려면 아침 일찍 일어나야 했다. 아침잠이 많은 나는 제시간에 일어나기 위해 한 가지 조치를 취했다. 문 옆에 작은 스탠드를 켜 놓고 자 어둠 때문에 일어나지 못하는 사안을 방지하는 것이다. 그날도 스탠드를 켜놓고 자고 있는데 새벽 두 시, 별안간 방 문이 열렸다. 낡은 나무 문은 열림과 동시에 어수선한 소리를 냈다. 소리에 잠이 깬 나는 문 쪽을 바라봤고, 그곳엔 새로 온 식구가 우두커니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에서 덜 깬 나는 꿈을 꾸는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스탠드 덕에 그의 형태는 정확히 보였다. 그는 아무 말없이 몇 분 동안 나를 가만히 바라만 보다가 방을 나갔다.


공포심과 동시에 화가 치밀어 올라 나는 바로 그를 따라 나갔다. 부엌으로 들어간 그를 붙잡고 방금 내 방에 왜 들어온 것이냐 묻자 그는 그런 적이 없다며 시치미를 뗐다. 너무도 평온한 얼굴로 거짓말을 하는 그에게 말문이 막힌 나는 그대로 방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도츠카에게 이 사실을 말하자 그는 펄쩍 뛰었다. 도츠카는 새로 온 식구가 냉장고에서 자신의 음식을 훔쳐 먹고 발뺌해 마음에 안 들어 한 참이었다. 우리는 다니엘에게 이 사실을 알리며 해결책을 요구했지만, 그의 친구였던 다니엘은 나보고 되려 바람 때문에 문이 열린 것이 아니겠냐고 의심했다.


그는 나에게 사과를 했지만 내 방에 왜 들어왔던 것인지에 대한 정확한 이유를 끝내 밝히지 않았다. 이후에도 청소 문제로 그와 여러 번 부딪혔다. 나는 터널 안에 갇혀 있던 시기에 집에서도 온전한 정신으로 있지 못했다. 타인에게 싫은 소리를 하기 싫어 지금껏 최대한 갈등을 피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결국 그가 떠나는 날 대판 싸우는 것으로 모든 일을 마무리했다.

 

나는 그 집에서 일 년 반을 살았다. 내가 일 년쯤 살았을 때 여름 방학을 맞이해 한국에 다녀왔는데, 다시 집에 돌아오니 도츠카는 이사를 갔다는 메시지만 남겨두고 없었다. 나는 두 달 정도 큰 집에서 혼자 살며 자유를 만끽했다. 누군가와 같이 산다는 것은 신경 써야 할 일이 많다는 뜻이라, 나도 모르게 혼자 있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하우스 메이트가 들어왔다. 연말까지 계약이었던 나는 더 이상 재계약하지 않고 새로운 집을 구했다. 나는 무조건 혼자 살 수 있는 집을 구하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매물이 나오지 않는 12월, 셰어 하우스도 아닌 원룸을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나는 결국 부동산에 갔다. 부동산에서는 곧바로 혼자 살만한 집을 보여줬다. 엘리베이터 없는 4층 건물의 꼭대기 집이었지만, 방도 두 개나 있는 넓은 집을 혼자 쓸 수 있었다. 게다가 다락방 모양의 지붕인 탓에 방에서 아늑한 기분도 낼 수 있었다. 나는 바로 계약서를 작성했다. 집주인이 오지 않고 부동산에서 전부 해결하는 것이 조금 이상했지만 얼른 셰어 하우스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열심히 짐을 옮겼다.


하지만 그곳엔 엄청난 함정이 있었다. 스페인은 난방 시설이 잘 갖춰져 있지 않다. 그 집은 가스를 통해 개별난방을 트는 방식이었다. 문제는 가스가 소멸되는 시간이 굉장히 짧았다. 부동산에서는 두 개의 가스로 3개월에서 6개월은 충분히 쓸 수 있을 것이라 장담했다. 난방 시설에 무지했던 나는 그 말을 믿고 계약을 마쳤다. 가스를 사려면 먼저 지역 내 가스 회사에 전화를 해야 했다. 그러면 다음날 배달하는 방식이었는데 예약은 안됐다. 무조건 하루 전날 신청을 해야 완료가 됐다. 그 덕에 처음 이틀은 난방과 온수 없이 지냈음에도 내일이면 집안이 따듯한 온기로 채워지겠다는 기대로 버텼다.


하지만 시간이 안 맞았다. 내가 집에 없을 때 도착한 배달원은 아무도 없자 그대로 다른 집으로 가버렸다. 가스 회사에 전화를 해보니 다시 신청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나는 어제 신청을 했음에도 내일 가스를 받을 수 있다는 소리였다.


우여곡절 끝에 가스가 도착했다. 따듯하게 난방을 틀고, 따듯한 물로 기분 좋게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드디어 나만의 집이 생긴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그 기분은 3일도 가지 않았다.


코 끝의 시림 때문에 잠에서 깼다. 분명 방 안의 난방을 조금 틀고 잤는데 냉장고 속에 있는 기분이었다. 보일러를 향해 가보니 가스가 남아 있음에도 가스가 부족하다는 표시가 보였다. 당황한 나는 집주인 대리인에게 연락했다. 대리인은 집으로 와 보일러를 살펴보더니 산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고장 났을 리가 없다는 뜻을 전했다. 집주인과는 왜 연락조차 안 되는지 모르겠지만, 대리인은 가스를 아껴 쓰라는 말만 남긴 채 떠났다. 결국 3개월을 쓸 수 있다던 가스는 3일 만에 동이 났고 다시 추운 하루를 보내고 나서야 가스를 받을 수 있었다.


이번엔 최대한 아껴 썼다. 온수를 위해 난방은 틀지 않은 채 패딩과 전기장판, 수면 양말로 버텼다. 그럼에도 가스의 수명은 5일. 주말이 낀다면 꼼짝없이 냉장고 같은 집에서 버텨야 했다. 심지어 가스 배달은 제 때 오지 않기 시작했다. 신청을 했음에도 이틀, 삼일 동안 오지 않는 날이 비일비재했다. 가스 회사에 항의 전화를 걸면 배달원의 개인 사정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한겨울에 차가운 물로 샤워할 수 없어 물을 끓여도 봤다. 하지만 매일 할 수 없었다. 결국 집 앞 5분 거리 호텔에 가서 하루를 보내는 날까지 생겼다.


겨우 가스를 받아 집이 따뜻해진 날이면 샤워 커튼이 무너지고, 전에 살던 할아버지가 대뜸 찾아와 이해할 수 없는 부탁을 하고 갔다. 한 달을 사는 동안 하루도 조용히 넘어가는 날이 없었다.


바깥보다 훨씬 추운 우리 집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자 서러움이 밀려왔다. 나는 그 길로 부동산에 가 울먹거리며 그간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부동산에서는 무사히 계약을 파기하고 새 집을 찾아줬다. 부동산 중개인과 새로운 집주인은 나에게 연신 이 집은 춥지 않음을 강조했다.


새 집은 혼자 살기 적당한 크기의 원룸이었다. 엘리베이터도 있고 무엇보다 가스 대신 보일러로 온수를 조절할 수 있었다. 집주인은 나를 걱정하며 새로운 난로를 챙겨줬다. 방음이 되지 않아 옆집의 전화 소리, 알람 소리, 심지어 코 고는 소리까지 들렸지만 나는 만족했다. 타지에서 내 터를 잡는다는 것이, 열 평 남짓인 나만의 월세방을 얻는다는 것이 이토록 어려운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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