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하늘로 돌아가시다.
이천이십이년, 오월 초하루. 밤 10시 4분.
아버지가 하늘로 돌아가셨다.
지난 밤부터 아침까지 마음 깊숙이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하던 그날도 이런 기분이었다. 그랬다. 불안함에 동생에게 전화를 해서 아버지의 상황을 물었다.
"괜찮을 거야. 수술 잘 됐고 일주일 뒤면 퇴원도 가능하고 그러면 다시 재활 병원으로 들어가실 거야."
"그래? 다행이네. 계속 불안해서 전화했어. 고맙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불안함이 가시질 않았다. 그래, 괜찮을 거야. 별일 없을 거야. 이 말을 주문처럼 외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주일 오후. 동생으로부터 아버지가 많이 춥다고 하신다고, 조금 상태가 좋지 않으시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한 시간 후에는 아버지 혈압이 계속 떨어져서 승압제를 사용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의사의 말을 전해주었다. 저녁 일곱 시. 동생으로부터 아버지가 돌아가실 수 있으니 지금 당장 인천으로 올라오라는 소식을 들었다. 밤 열 시. 동생보다 내가 먼저 도착해서 중환자실에 계시는 아버지를 뵈었다. 의식을 간신히 붙잡아두고 있는 상태라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아버지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의사의 이야기가 귀를 때렸다. 그러나 귀를 때릴 뿐 내 안으로 들어와 어떤 힘을 발휘하진 못하고 있었다. 귓가를 때리던 이야기가 끝나고 비로소 나는 아버지에게 말을 걸 수 있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단 한 번도 나는 아버지에게 사랑한다느니 존경한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의식이 멀어져가는 이 상황이 되니까 아빠, 고마웠어요... 사랑했어요... 진심이에요.. 그러니 조금만 더 힘내주세요. 아빠, 아빠 덕분에 제가 이렇게 컸어요. 그러니 이제 어서 의식 차리시고 건강해지신 후에 집에 가야죠... 네? 이런 이야기들을 하기 시작한다. 내 말이 가서 닿을지 말지도 모르는 이 상황이 되어서야 말이다.
동생이 도착하고 바로 아버지는 숨을 거두셨다.
아버지는 중환자실에서 우리가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셨던 것만 같았다. 우리의 목소리는 듣고 가고 싶은 마음에 희미해지는 의식을 움켜쥐셨다가 우리가 도착하고 나서야 비로소 손아귀에 힘을 푸신 것만 같았다. 항년 일흔여섯. 누군가의 남편이었고 나에게는 아버지셨던 한 남자의 삶이 이렇게 세상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렀다. 처음 치르는 집안의 큰일을 동생과 나는 잘 마무리했다. 주변 지인들과 친인척들의 도움과 위로 속에서 우리는 힘든 줄 모르게 발인까지 잘 마쳤다. 그리고 어머니를 모시고 5월 5일 삼우제까지 지내고 나서야 나는 울음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제대로 울 수나 있을까 싶었는데 공식적인 모든 절차가 끝나고 아버지의 빈 자리를 체감하자마자 그 허무함과 서러움 미안함 등에 소리내어 울 수밖에 없었다. 엄마와 동생 앞에서는 울음을 안으로 삼키고 혼자 남았을 때에는 누가 건드리지 않아도 소리내어 울었다.
전쟁 중에 태어나 가난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한 사내는 그 누구의 도움 없이 오랜 시간 삶을 견뎌야 했으며 비극적이게도 남편의 삶과 아비의 삶을 배워본 적이 없기에 어느 순간부터는 꼰대 가부장으로 살아야만 했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고 했던가. 사회 구조와 잘못된 문화 속에서 또다른 피해자일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를 어쩌면 나는 다른 방식으로 사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