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도 엄마도 동생도 나도 모두.
4월 중순, 병원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아버지의 간에 종양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십이지장에도 동일하게 종양이 보인다는 소견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십이지장에 생긴 종양이 장을 막고 있어 아버지는 음식을 섭취할 수도 없고 또 장 안에 있는 묵은 것들이 나가지도 못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다시 대학병원에 입원하셨다.
이제 막, 두 발로 서는 것이 많이 편해진 어느 봄날이었다.
아버지의 외래가 잡힌 날. 아버지를 모시러 병원에 갔을 때 아버지는 유독 자신만만한 모습이셨다. 따로 도와드릴 필요 없이 두 다리로 굳건히 버티시며 차에 잘 올라타셨다. 아버지는 그걸 내게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이었다. 이만큼 괜찮아졌다고, 이제 곧 걷기 연습도 할 것이고 그러면 아들들에게 더 미안할 일 없이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아버지의 무언의 메시지였다.
사실 아버지는 더 빨리 걷고 싶으셔서 밤 중이면 혼자 화장실에 가시려다가 혼나시기도 하고 기회가 되면 무조건 당신의 다리로 걸어 무언가를 하시려고 하셨었다. 물론 이런 아버지의 고집은 병원과 마찰을 일으켰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곧 집에 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에 매일 매일 재활 치료를 잘 받고 계셨다. 그렇게 아버지는 아버지의 삶을 견디며 나아가고 계셨다. 그런 아버지에게 재입원은, 너무나 먹먹한, 소식이었다. 집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아버지의 염원은 그렇게 한 걸음, 두 걸음 멀어졌다. 장폐색에 암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소식, 먹는 즐거움은 사라진 채 그저 링거를 통해서 삶을 이어가야만 하는 현실을 아버지는 다시 견뎌내셔야만 하셨다. 산 넘어 산, 고개 넘어 늪. 무엇 하나 쉬운 것이 없는 연속이었다.
삶을 견디는 것이 살아있음의 증거다. 이 지극히 당연한 명제는 그 자체로 끈덕진 힘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아버지도 나도 동생도 그리고 엄마도 살아 버티기로 작정한다.
아버지의 수술 날짜가 정해졌고 나는 아버지의 수술 동의서에 서명하기 위해 4월 29일 새벽, 인천으로 출발했다. 수술실로 들어가는 아버지는 내게,
"아침은 먹었냐. 배고플 텐데. 밥은 챙겨먹어야 한다."
"아빠, 괜찮아요. 저 먹었어요. 걱정 마세요"
"나 빵 하나 있는데 그거 줄 테니 먹어라."
"아빠, 저 괜찮아요. 아빠, 수술 끝나고 봬요. 건강하게 봬요. 아빠, 잘 다녀오세요."
수술은 잘 끝났다.
토요일에 아버지는 엄마에게 전화를 거셨고 크게 문제 없다고, 몸이 조금 춥긴 하지만 괜찮다고, 혹시 모르는 상황이 생길 수 있어서 중환자실에 들어간다고, 의사들이 그러는데 일주일이면 퇴원해서 다시 재활 병원에 갈 수 있다고.
아버지는 아주 정정하고 밝은 목소리로 엄마에게 말씀하셨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