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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적 소시민 Apr 21. 2022

16. 아버지만큼이나 아픈 엄마

빼앗긴 엄마의 통장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변치 않는 영원한 사랑은 믿지 않는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의 것이 없이 살아본 사람은 영원한 사랑이라는 말이 얼마나 허상일 수 있는지 안다. 가족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가족 구성원이 온전히 서로를 보듬기 위해서는 각자가 최소한의 경제적 여건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역시 가장 취약한 구성원은 '엄마'일 수밖에 없다.

 



 엄마가 자기 이름으로 된 집을 가지고 있었던 건 딱 4년. 엄마 통장으로 다달이 들어오던 월급 30만 원도 4년 만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엄마의 경제 생활이 끝이난 건 동생이 아파트에 당첨이 되고 나서였다. 동생은 동생 나름대로 아버지와 엄마를 더 넓은 집에 모시고 싶었다. 그리고 동생 역시도 지금보다는 더 나은 보금자리를 꿈꾸고 있었을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이 아파트에 들어가기 위해서 엄마는 다시 자신의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엄마, 엄마가 원하지 않으면 그 집 팔지 말고 그냥 엄마가 가지고 있어요. 엄마가 지금 원하는 바로 그 선택을 하면 좋겠어. 엄마가 행복한 선택."

 "나도 그러고 싶은데... 어떻게 그르냐. ㅇㅇ이가 그렇게 원하는데...."


 말씀은 그렇게 하셔도 엄마는 정말 그 집을 팔고 싶지 않았다. 자기 이름으로 된 바로 그 집은 엄마에게 집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평생 처음 자기 이름으로 된 무언가를 가져본 엄마, 그 집 덕분에 다달이 들어오는 돈을 처음 만져보고 그걸로 자기가 원하는 걸 사는 기쁨을 처음 누려본 엄마는 그 집을 정말로 팔고 싶어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결국 엄마는 동생의 성화에 결국 집을 팔고 그 돈을 동생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엄마는 다시 조금씩 시들어가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병원비는 상당했다. 한평생 자식이라는 보험 하나 믿고 살아온 분들이셨기에 나나 동생은 그 보험 역할을 어떻게든 해내야만 했다. 아버지에게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상황에서 시들어가는 엄마의 마음에는 멍이 하나씩 생기기 시작했고 그 멍은 과거의 상처들을 모두 깨워버리고 말았다. 아버지의 무관심에 엄마와 동생들과 연을 끊게 되었던 일들, 아들들이 다 크자 폐지라도 주으러 다니라는 모욕적인 말들, 자신의 것 하나 없이 어떻게든 집안 살림을 꾸려나가야만 했던 가난함, 그렇게 아들들을 키웠지만 정작 보험 같았던 아들들의 돈은 아버지의 병원비로 다 휘발되는 상황에서 어머니는 폭발하고 말았다.


 "너그들끼리 잘 살아라. 니 아부지 일이라면 두손 두발 다 걷어붙이고 달려드는 송씨 자식들, ㅇㅇ이도 ㅁㅁ이도 다 니 아부지랑 가서 살어. 어? 니 아부지가 나한테 어떻게 했는데...? 너네 아부지한테 병원비는 수백 씩 내면서 너네 나한테 단돈 백만 원이라도 보낸 적 있었어? 나는 혼자여. 나는 가족이 없어. 내가 빨리 죽어야 하는데 죽지 못해 사는구먼."


 엄마는 그렇게 멍든 마음을 쏟아내고 있었다. 수십 년, 치유되지 않은 상처로 인한 고름들을 토해내고 있었다. 사실 동생은 엄마의 저 말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드라마나 영화 속 혹은 소설 속에서 마땅히 보여주는 '모성'과 전혀 다른 이야기들을 쏟아내고 있었으니 아버지를 닮아 가부장적인 동생은 엄마의 말들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여성으로서의 엄마, 자기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 엄마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을 테니 말이다.

 자식들에게 폐 끼치고 싶지 않아 병원도 가지 않는 엄마, 자식 생각해서 자기 명의로 된 집을 4년 만에 팔아 돈을 보탰던 엄마의 눈에 아버지는 아들들 돈을 쪽쪽 빨아먹는 그 무엇이었고, 아들 둘은 그런 아버지를 사랑해서 돈을 갖다바치는 내 편 아닌 송씨 집안의 핏줄일 뿐이었다. 엄마가 평생 모아 자기 명의로 바꾼 집을 팔아 결국 아버지의 병원비로 들어가는 현실이 엄마는 너무나 서럽고 서러웠다. 이런 엄마를 나도 모두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해 못할 일도 아니었다.


 한참을 엄마 이야기를 듣다가 나는 엄마에게 바로 현금 백만 원을 엄마 통장으로 부쳤다. 마음이 아픈 엄마에게 제일 필요한 약은 '돈'이었다. 제대로 자기의 것이었던 적이 없었던 바로 그 '돈'. 아버지 치료비로 몇 천을 쓰는데 엄마 마음 치료비로 백만 원은, 오히려 작은 금액이었다.


 "엄마, 백만 원 부쳤어. 얼마 안 되지만 일단 이거 갖고 있다가 필요할 때 엄마 써요. 엄마가 그동안 돈 없이 살아서 그래. 엄마 것 없이 살아서 엄마가 지금 아픈 거야. 마음이 아프고 그런 거야. 그러니까 일단 이거 써요. 그냥 갖고만 있어도 돼요. 사람은 돈이 있어야 마음이 편안해져요."

 

 엄마는 말을 아끼셨다. 실컷 감정을 토해내면 정신도 어느 정도 안정을 찾는다. 돈 백만 원은 엄마의 마음이 이해받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렇게 엄마는 오늘을 버틸 것이고 또 당분간을 버틸 것이다.

 나는 오늘, 엄마를 보면서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우리는 사랑으로만은 삶을 영위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안타깝지만 이게 현실이다. 그런데 과거 우리는 '모성'이라는 이름의 사랑으로 우리의 엄마들을 착취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오롯이 남편과 자식을 사랑해야만 하고 희생하고 헌신해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고 하면 우리는 그런 엄마들에게 최소한의 '경제적 독립'이 가능한 정도의 돈을 주었어야만 했던 것은 아닐까.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지만... 언제고 정리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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