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털처럼 가볍게, 가볍게...
명절이 즐거웠던 적은 아주 어렸을 때를 빼고는 없었다. 삼시 세 끼를 챙겨 먹는 정도로는 명절은, 명절일 수 없었다. 명절 음식 몇 가지라도 밥상에 오르려면 돈이 필요한데 우리집 돈주머니에는 구멍이 났는지 채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가난도 죄였다. 돈 없는 가족은 친인척도 반기지 않는 법. 우리는 적당히 눈치를 챙겨야만 했고 그래서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그것도 하루이틀이지. 우리 가족은 우리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우리가 자처했으나 원해서 한 고립은 아니었다. 그 덕에 우리는 명절이 되면 그저 집에서 밥 먹고 텔레비전이나 보며 뻑뻑한 쉼을 쉴 수 있게 되었다.
‘아싸. 우리집은 명절이라고 어디 안 간다. 교통체증을 경험할 일 없으니 얼마나 좋은가‘ 하는 생각을 하던 차에 볼 것이 없어 아버지는 텔레비전을 끄셨다. 그 순간 찾아오는 적막. 이내 아버지도 그 적막함을 이기지 못하시곤 다시 텔레비전을 켜놓으셨다. 아무도 보지 않아도 텔레비전은 켜있어야만 했다. 우리 모두 쉬고 있었지만 불편하기 그지없는 뻑뻑한 쉼. 그래서인지 명절이 되면 뒷목이 뻐근했다. 놀고 싶어서 노는 게 아니라 ‘놀아야만’ 해서 노는 시늉을 하는, 일종의 벌이었다.
고민을 적어 잘라내자. 무거운 줄 알았지만, 한낱 종이일 뿐이다.
이경준 작가의 사진전의 마지막 무대는 예상밖이었다. 단순한 관람을 넘어 관람객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전시회는 이미 많지 않았던가. 고민을 빼곡하게 적어 불에 태우는 의식 또한 흔하디흔한 장치이다. 다만 이걸 파쇄기로 대체했을 뿐. 뭐랄까. 처음 든 느낌은 허탈감이었다.
‘맞다. 나는 지금 이 명절을 견디고 버텨야 하는 한 사람이었지. 모두가 즐거워 보이는 풍광 속에서 저만치 먼 곳에서 그 즐거움을 응시하는 관람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
도시숲의 아름다움을 끊임없이 속삭여주었으면서 마지막 판에 사실, 도시는 비정한 곳일 수도 있고 너는 홀로 도시를 버텨야 하는 존재일 수 있다고 뒤통수를 한 번 후려갈긴 느낌이랄까. 한 걸음 떨어져서... 이 문구를 한참 들여다보다 인정하기로 했다. 이건 도시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인간이라면 모두가 겪을 수 있는 보편적인 문제일 수 있음을 말이다. 작가가 거리를 두고 도시와 도시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관찰했듯 이제는 내가 나 자신을 관찰해야 할 때가 도래했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주저 없이 내 고민을 빼곡하게 적어내려 갔다.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고민이라기보다는 ’지금은‘ 누구에게도 말을 걸기 어려운 시기이기에 말하기 어려운 고민들. 긴장이 올라오는 뻐근한 뒷덜미를 왼손으로 고요하게 짓누르며 천천히 흘러나오는 고독과 괴로움을 언어로 자리매김한다. 다시 읽어볼 필요 없는 그 언어들을 천천히 파쇄기에 얹고 손잡이를 돌리며 그 고민들을 잘게 잘라내기 시작한다.
전시회를 나오면서 문득 영화 ‘화양연화’의 마지막 장면 양조위가 앙코르와트 벽에 난 구멍에 대고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고 풀을 뽑아 그 구멍을 메우는 장면이 생각났다. 내 고민의 산은 지금쯤 어떻게 사그라들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