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집 말고 ‘우리집’

김장 김치

by 이기적 소시민

여러 이유로 마침표를 찍고 싶은 날이 있다.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지 않고 이 마침표 하나로 책 한 권이 끝났으면 좋겠는, 그런 날. 내 인생책을 누가 음미하며 읽어줄 거라는 기대도 없기에 그저 이런 심심한 결말도 괜찮지 않을까 무심히 생각해 본다. 영웅 서사의 마지막도, 두 사람이 서로 영원히 사랑하게 되었다는 로맨틱한 결말도 아닌 ‘그저 밤이 되어 잠들었고 그에게 아침은 다시 오지 않았다. 그러나 오지 않는 아침이 그립지 않았다.’ 이런 식의 결말도 꽤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다. 무덤덤하게 생각을 이어갔지만 사실 난 외로운 거라고 결론지었다.


올 리가 없다 여겼던 택배가 도착했다는 문자에 부리나케 집으로 향했다. 우리집 앞에는 단정하게 앉아 나를 맞이하는 택배 상자가 하나 있었다. 무게가 좀 나가는 택배를 뜯어보고 나니 한 포기가 넘는 김장 김치였다. 부랴부랴 김치통을 두 개 꺼낸다. 아기 다루듯이 김장 김치를 김치통에 잘 누인 후 뚜껑을 잘 닫아놓는다. 누가 보냈는지 짐작이 가기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친구 ㅇㅈ이의 어머님. 교회의 어른이자 신앙의 선배님이시지만 나는 늘 뵐 때마다 어머님의 이름을 부르며 사랑하는 ㅇㅅ씨라고 뛰어가게 되는, 우리 어무이가 보낸 김치였다. 우리 엄마도 보낸 적 없는 김치와 밑반찬을 나는 우리 ㅇㅅ씨에게 받곤 했다. 여차저차 서산 근처 들르시면 미리 연락하셔서 내 얼굴 한 번이라도 보고 가시는 우리 어무이 ㅇㅅ씨가 보낸 김치였다. 기도하시는 울 어무이, 울 ㅁㅁ이에게 김치 좀 보내주면 좋겠다고, 넉넉히 담아 주변 사람들과 나눠먹이면 좋겠다 말씀하셨다던 우리 ㅇㅅ씨는 ‘하나님이 울 ㅁㅁ이 엄청 사랑하시네. 김치라도 할라고 치면 ㅁㅁ이 얼굴이 생각이 나게 하시니 말야.’라고 말씀하셨다 한다.


그 말씀을 듣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청소였다. 밀린 빨랫감부터 세탁기에 넣어 빨래를 시작한다. 하는 김에 이불 빨래까지 할 참이다. 청소기로 자잘한 쓰레기들을 모두 빨아낸다. 침대와 장롱 밑은 물론 구석구석 집안에 있는 먼지들을 빨아낸다. 걸레를 빨아 바닥을 훔쳐내기 시작한다. 무릎을 꿇고 구석구석 열심히, 훔쳐, 낸다. 마음도 훔쳐, 낸다. 첫 번째 빨래가 끝이 나면 빨래 하나하나를 힘을 주어 물기를 털어낸 후 빨래 건조대에 하나하나 잘 펴서 말린다. 이불이며 요며 베갯잇까지 모두 벗겨 세탁기에 넣어 빨래를 한다. 그 사이 화장실을 청소한다. 거울이며 바닥, 변기와 세면대까지 뽀드득뽀드득 소리가 날 때까지 잘 닦아낸다. 쓰레기까지 모두 버리고 오니 이불 빨래도 끝이 보인다. 한숨 돌리고 나서 오래 쓰지 않은 밥솥을 꺼낸다. 그리고 옆집에 가서 쌀을 좀 빌린다. 오랜만에 밥물을 맞추는지라 서툴다. 다른 반찬은 하지 않을 작정이다. 그저 갓 지은 하이얀 쌀밥에 어무이가 보내주신 김장 김치를 얹어보려 한다. 이불 빨래가 끝나고 힘껏 물기를 털어낸 후 잘 펴서 말린다. 밥이 다 되었다. 김장 김치를 자를 때에 칼이나 가위를 쓰지 않는다. 오롯이 손으로만 찢어야 한다. 이것이 김장 김치를 대하는 예의인 것이다. 흰 밥 위로 김이 모락모락. 빠알갛게 색이 고운 김장 김치를 흰 밥 위에 얹어 입으로 가져온다.


김장 김치를 손으로 찢어 윤기 나는 하이얀 쌀밥 위에 얹어 먹을
내일 점심을 떠올린다. 그 다음날 저녁과 그 다음다음 날 점심도.


맛있다. 인천 청라 어느 곳에서 서산 사는 ㅁㅁ이를 떠올리며 김치를 담아내셨을 울 어무이와 친구 ㅇㅈ이의 마음이 너어무 맛있다. 김장 김치를 손으로 찢어 윤기 나는 하이얀 쌀밥 위에 얹어 먹을 내일 점심을 떠올린다. 그 다음날 저녁과 그 다음다음 날 점심도. 이번 겨울은, 이 김장 김치로 해 먹을 밥 한 끼로 삶의 문장을 이어가야 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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