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수업 일기

어여쁜 마음은 어여쁜 그릇에

by 이기적 소시민

”선생님! 어제 너무 감동적이었어요오! 감사해요오오오!“


한 녀석이 해맑게 웃으며 다가온다. 뭐가 그렇게 감동적이었는지 물으니 분명 선생님이 혼을 낼 줄 알았는데 오히려 응원해 줘서 기분이 좋았단다. 아하. 6월 모평이 끝나고 아이들에게 가채점 결과를 보내라고 했고 보내오는 아이들에게 한 마디씩 말을 걸었는데 그 이야기였다.

워낙 걱정도 많은 녀석이다. 거기에 지난 모의고사 때보다 성적이 다소 좋지 않다 보니 6월 모평 이후 표정이 밝지 못했다. 현실적인 이야기보다 수능이라는 파도에 익숙하지 않아 그런 것이라고, 처음 하는 서핑에서는 물도 많이 먹고 그러는 법이라고, 파도와 익숙해지면 분명 좋아질 거라는 요지였다.


저기요, 다들! 나는 친구랑 댓글이 복붙이거든요? 이름만 바꿨다구요?!


자, 이야기가 이렇게만 끝나면 아련하고 포근한 에피소드로 마무리가 되겠지만 문제(?)는 다음부터였다. 내가 써준 댓글 내용을 폭로(??)하기 시작하는데.... 왜 내 댓글은 딸랑 한 줄이냐, 비유 하나 없는 무미건조한 댓글을 어떻게 할 거냐... 아이들이 원성이 커져간다.


”다들 조용히! 나는 거의 팩폭에 너덜너덜해졌으니!!! 하아. 이거 댓글 내용이 너무 다른 거 아닌가요?“


그때 한 녀석이 등판해서 마지막 폭탄을 날렸다.


“저기요, 다들! 나는 ㅇㅁ이랑 댓글이 복붙이거든요! 어? 이름만 바꿨다구요?!!! 이보다 더 큰 비극이 있을까요?”

아버지.... 머리가 아찔해진다. 알고 보니 내가 그렇게 댓글을 써주면 옆에 있는 친구들끼리 서로 서로 내용을 공유하고 있었단다. 어쩌겠는가. 일단은 아이들에게 크게 웃으면서 아이들에게 사과 겸 변명을 할 수밖에.


”진짜 미안 미안. 가채점 점수를 받으면서 무겁지 않게 피드백을 해주려고 쓰기 시작한 거고요. 내용이 같은 건 정말 두 사람의 양상이 거의 똑같은 수준이어서 내용이 같았단 거였어요. 그리고 팩폭이라뇨. 진짜 팩폭은 날리지도 않았는데요! 자, 이제 시작해 볼까요? 그럼에도 이게 이렇게 큰 이슈인지 몰랐네요. 다음에는 내가 전하고 싶은 마음을 그 마음에 잘 어울리는 그릇에 담아서 전달해 보도록 할게요.“


다음 번 멘트 기대하다는 아이들, 자기 멘트에도 저렇게 멋드러진 비유를 꼭 넣어달라는 녀석과 복붙 금지를 외치는 녀석들과 깔깔대며 웃어댔다. 교사도 나름 연예인이고 인플루언서라고 하더니만, 그 말이 참 맞는 말인 듯싶다.




왁자지껄 기분 좋게 떠들던 교실은 아이들이 수업을 떠나자 이내 고요해졌다. 어떻게 보면 흘려보내도 될 에피소드겠지만 문득, 생각에 뿌리가 나고 가지를 뻗어 올리기 시작했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다는 건 서로에게 그릇이 되어준다는 의미이다. 상대방의 감정이 어떠하든 그 감정이 내 마음의 그릇에 쌓이는 것이 전혀 거리낌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친밀해졌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내가 어떤 상태이든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자신의 마음에 담아주는 걸 경험한다는 것이 얼마나 푸진 안정감을 주는지. 그런데 생각해 보면 상대방의 마음 그릇이 크면 클수록 우리는 그것이 너무나 당연해져서 내 날것의 감정을 상대방에게 무턱대고 던져 버리게 된다. 그것이 얼마나 무례한 일이 될 수 있는지.


사실 우리 반 녀석 몇은 어느 정도 관계가 되다 보니 서로에게 편안하게 이야기를 던지곤 하는데 그 과정에서 가끔은 소위 ‘팩트 폭격’을 적나라하게 던지곤 한다. 내 딴에는 이 정도는 충분히 내 마음을 이해하고 있겠지 싶어서 말이다. 그런데 오늘 있었던 일을 생각해 보니 그 또한 내 착각일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좋은 마음은 좋은 말과 글에 담는 것이 좋다. 상대방이 쓰게 받아들여야 할 것들도 이왕이면 좋은 그릇에 담아서 사탕과 함께 내미는 것이 지혜가 아닐까 싶다.


초여름의 청량함이 기분 좋은 요즘. 친밀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어여쁜 그릇에 내 마음을 담아보리라 마음먹는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세상과 마주하는 시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