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어느 날. 현 국토대장님에게 연락이 왔다.
"그동안 많이 쉬었으니.... 올해 국토 진행팀 한 번 해주시죠. 올해는 진행팀을 보강해서 조금 더 완성도 있는 국토를 해보고 싶어요. 올해 국토 진행팀에서 순천만국가정원에서 조별로 그 정원을 거닐고 또 누릴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하나 짜고 싶고 무엇보다!! 아이들이 숙소에 도착했을 때 아이들을 환대해 줄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 방법은 진행팀에게 일임할게요. 그러려면 꼼꼼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거기에 ㅅㅇ쌤이 딱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국토를 쉰 지 언 십 년. 뜬금없는 제안이다. 내가 왜 국토를 내려놓았던가. 거절의 의사를 밝히려는 순간,
"무엇보다 ㅅㅇ쌤이 함께해 주면 하겠다는 사람들이 있어요. 쌤이 안 하면 뭐.... 진행팀 요원은 다 빠개지는 거죠."
무언의 압박이다. 그러나 기분 좋은 압박이다. 누구냐는 질문에 진행팀으로 함께할 선생님들의 이름이 호명되었다. ㅇㅇ, ㅇㄱ, ㅅㅁ 그리고 나 ㅅㅇ까지. 오호라. 나와 상성이 좋은 분들이다. 무엇보다... 서로 비슷한 사람들이면서 평소에도 친분이 있던 분들이다. 그렇게 십 년 만에 다시 국토로 복귀하겠다고 의사를 밝힌다.
2024년 7월 국토 3일 차.
'갱번마루' 숙소. 폐교가 된 초등학교를 인성학교로 탈바꿈한 곳이었다. 사실 이곳은 우리 진행팀에게는 숙제와도 같은 곳이었다. 보기에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이었으나 어째 우리 눈에는 참담하기 이를 데가 없는 곳. 하아. 한숨부터 나왔던 곳이었다. 턱없이 부족한 잠자리여서 과감한 결정이 필요했다. 이곳은 우리 진행팀이 맡기로 하고 행군팀은 비롯하여 나머지 서포터 팀들은 외부에서 자는 것으로 했다. 교사들 수만 해도 수십 명. 이틀 전부터 근처를 샅샅이 뒤져 남녀 교사가 잘 작은 펜션 두 채를 빌렸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펜션처럼 보이는 곳은 무작정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두드리는 자에게 문은 열렸으니. 구수하고 맘씨 좋은 분들을 만나 교사들을 위한 잠자리는 마련했다.
이제 남은 건, 아이들 방 배치. 의외로 아주 간단했다. 여학생들 방배치를 하고 난 후 남학생들은 모두 거대한 강당에서 같이 자는 걸로. 100명 남짓한 남학생들을 임장할 교사는 국토대장님과 진행팀 남교사 둘 당첨! 아이들을 맞이하기 위해 갱번마루에 도착했다. 아름다운 곳이었다. 산골에 위치한 폐학교는 나름 잘 꾸며져 있었다. 시원한 바람, 짙은 녹음. 그런데 이곳은 경치보다도 사람들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이렇게 많은 아이들을 수용하시는 건 처음이시라고 수줍게 이야기해 주시면서 정말 잘 환대하고 싶으시다며 새 이불과 새 베개를 구입해 주셨다. 거기에 혹시나 모기 물릴까 봐 전기식 모기향을 십수 개 사놓으셔서 곳곳에 켜두신 상황이었다. 포장된 이불과 베개를 함께 꺼내면서 그곳 팀장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실,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만, 사람이 좋고 공동체가 좋아 홑몸으로 이곳에서 교장 선생님과 함께 이 사역을 하신다는 말씀에 사람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 있었다는 것만 기억이 난다.
드디어 아이들이 도착했다. 일사천리로 배정된 방으로 아이들을 안내하고 저녁 식사 시간. 식당이 협소한 관계로 총 네 팀으로 나눠 식사를 하는 것으로 한다. 식당 주방을 지켜보는 것이 또 그렇게 쏠쏠하다. 총 주방장 격으로 보이는 허리 굽은 할머니 한 분이 소리 없이(?) 눈짓만으로 지시를 하시면 옆에 서너 분의 아낙네들이 고기를 볶아내고 국을 끓여대고 달걀을 부치기 시작한다. 다들 마을 분들이시라고 한다. 학교에서 이렇게 행사가 있을 때마다 동네 어르신들이 집밥처럼 저녁이며 아침을 해주신단다. 에어컨을 틀어도 더운 판에 주방 안에는 선풍기만 돌아간다. 구수한 사투리에 동네 아주머니들은 재미지게 음식을 만들어내신다. 그 옆에 나를 비롯한 진행팀원들이 배식을 담당하기로 한다. 처음에는 동네 아주머님 한 분이 배식을 해주실 예정이었으나 줄이 쉬이 줄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가 투입! 재미진 전투가 벌어진 듯 주방에서는 쉴 새 없이 음식들을 해대고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신나게 배식을 해댄다.
그 난리통 속에서 꽤 오래전부터 주방 쪽을 유심히 지켜보는 꽤나 젊은 남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갱번마루에서 일하시는 분이신가...?'
아이들이랑 딱 하루 우리도 손으로 같이 걸었어요.
밤이 깊어간다. 국토의 저녁, 아이들은 조별로 모임을 하고 간식도 먹으면서 정비에 들어간다. 식당에 두고 온 물건은 없나 확인하러 식당에 들어갔다. 불이 꺼진 식당 안쪽, 작은 방에서 도란도란 소리가 들린다. 이 밤중에 사람이...? 하는 찰나, 문이 열리고 저녁 식사 때 봤던 청년이 불쑥 나온다.
"아이쿠, 깜짝이야! 누구세요?!!!!"
"아.. 아니... 수상한 사람 아니구요...!!"
이내 주저리주저리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사실, 오늘 저녁, 내일 아침까지 밥 해주시는 분들 중에 우리 어머니가 계셔서요. 일 끝나셨으면 모시고 집에 가려고 했는데 우리 어머님께서 내일 아침 아이들 밥 해 먹일라고 하면 집에 가서 자고 오믄 늦는다고 성화셔서요. 그렇다고 저 혼자 갈 수는 없어서... 저도 여기 식당에서 자고 가려구요."
눈짓 하나로 모든 걸 진두지휘하시던 바로 그 할머니! 바로 그분의 아드님이셨던 것이다. 내 손으로 밥을 하는 건데 함부로 하실 수 없다며 아침부터 모든 식사 준비를 하고 계셨더란다. 다음 날 아침도 일찍 먹고 가는데 그거 준비하려면 새벽 2시부터는 일어나셔야 한다고, 기어이 댁에서 안 주무시고 좁디좁은 식당 방 한 칸에서 주무시기로 하셨단다. 저녁 식사가 다 끝난 게 거의 여덟 시. 뒷정리와 설거지까지 다 끝난 시간이 아홉 시가 넘었는데 몇 시간 눈 붙이셨다가 바로 아침 식사 준비를 하신다니. 놀랄 노자다.
"아드님께서 걱정이 크시겠어요. 감사하고 송구해서 어째요."
"뭐.. 걱정이 안 된다면 거짓말이죠. 자꾸 잠이라도 좀 편한 데서 주무시라고 해도 도무지 말씀을 안 들으세요. 그래도 오늘 반찬이 하나도 안 남았다고 참 좋아하시면서도 걱정이 태산이셨어요. 혹시 모자라면 어쩌냐고. 그러면서도 아이들이 고기반찬 다 먹고 김치를 어떻게 잘 먹는지 너무 보기 좋으셨다고 하시더라구요. 여기서 저도 좀 자고 새벽에 같이 일어나서 어머니 좀 도와드리려구요. 선생님도 피곤하실 텐데 어서 좀 주무세요."
말없이 주방을 진두지휘하시던 老장군에게서 훈내가 났다. 생각해 보니 아이들이 그렇게 먹어댔는데 음식이 모자라지 않았다. 주방 내 음식이 거덜 나는 걸 보며 음식 모자랄까 염려도 하셨겠지만 이 아이들이 내 밥을 남김없이 다 먹는 데서 오는 자부심과 흐뭇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우리 엄마가 생각났다. 제 자식 잘 먹는 모습을 그렇게 좋아하시던 엄마 그리고 그 엄마의 엄마가 생각났다.
벌컥, 한 번 더 문이 열리고 老장군께서 급히 일어나 나오신다.
"선생님 피곤하실 텐데 왜 안 주무십니까. 어여 가서 쉬세요. 얘야 너도 어여 집에 들어가. 여긴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걱정 말고 편하게 집에 가서 자."
"엄마 두고 내가 어떻게 가요. 내가 도와줄 테니까 조금만 늦게 일어나요. 엄마 몸 상할라."
"됐다. 니 일은 니 일. 내 일은 내 일. 내일 또 걸어서 먼 길 간다는데 내가 잠이 오겄냐. 뭐라도 해야지. 내가 알아서 할 거시니까, 어여 가봐."
"아유, 알았어요. 곧 들어갈게요. 모기 들어가요, 엄마. 어서 문 닫아요."
부랴부랴 목례만 간단히 건네고 청년은 그 방으로 나는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 새벽부터 일어나 배식을 하러 간 식당에는 여전히 말 대신 눈빛으로 젊은 아낙들을 진두지휘하시는 老장군이 자리를 지키고 서 있으셨다. 새벽에 도착한 젊은 아낙들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수다는 잊지 않으셨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런 말씀을 드렸다.
"우리 밥 해 주시려고 새벽부터 나오셨을 텐데 정말 감사해요."
"우리가 무슨 고생을 해요. 우리는 그저 하루 일하는 건데요. 괜찮아요. 아이들이 잘 먹어주니 그게 참 기쁘네요."
이런 대화가 오고 가는 중 우리의 老장군 할머니께서 한 마디 툭, 던지셨는데 그 말이 참 오래 남았다.
5일 내내 직접 발로 밟아가며 걷는 아이들이랑 딱 하루 우리도 손으로 같이 걸었어요.
이하. 이 어르신은, 식사 준비를 넘어 이 아이들과 꼬박 하루를 함께 '걷고' 계셨구나. 기분 좋게 싸다귀를 한 대 맞은 것만 같았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