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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옷부부 May 22. 2022

길상이의 천국 다합_EP1

홍해의 프리다이빙 강사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라면 세계여행이든 뭐든 낯선 곳으로 길게 떠나보라고 말하고 싶다. 낯선 그곳에서 상대방의 진면목은 나타난다.

우린 여행을 떠나기 전 싸움을 자주 하는 부부가 아니었다.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 만나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늦게까지 영화를 보거나 드라이브를 했다. 일상생활에서 둘이서 싸울 일은 거의 없었다. 둘의 문제보다 가족문제로 많이 싸운다고들 했지만 다행히 시어머니는 남편보다 더 어진 성격이셨다. 또 멀리 떨어져 있다는 핑계로 자주 뵙지도 못했으니 갈등도 없었다. 시끄러울 일 하나 없는 결혼생활이었다.

여행을 시작하고부터 우린 매주, 매일 아주 사소한 것들로 말다툼을 했다. Best top 3 이유를 몇 가지 들자면 첫째, 길상이가 영어를 말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남편은 해외여행을 하면 아무런 노력 없이도 자연스레 언어가 일취월장할 것이라는 착각을 했다. 하지만 누구나 알고 있듯 노력과 시간 투자 없이 얻어지는 것은 없다. 길상이도 이 사실을 알면서도 애써 외면했다. 나는 우리 부부의 입이자 귀 역할을 했고, 남편은 지도를 보고 길 찾는 눈 역할을 주로 맡았다. 하지만 길을 찾는 과정에서도 현지 사정과 길이 맞지 않을 때는 질문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오고 만다. 그럴 때 조차도 남편은 입을 다물고 핸드폰만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그 모습을 보고 답답한 나는 남편을 다그치다 결국 말다툼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일 년이 지났을 무렵, 길상이도 이제 차표를 끊거나 길을 물어볼 수 있을 정도로 영어를 말할 수 있게 되었지만 듣는 것은 여전히 힘들어했다. 공부를 하지 않으니 당연한 결과라고 말했지만 이 인간은 오히려

“난 지금 이 정도 실력이면 충분하다 생각하는데.”

라며 뻔뻔함을 무기로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다. 사람은 누구나 잘하는 분야가 있기 마련인데 나의 경우는 언어다. 중국어를 전공하기도 했고, 자연스레 영어를 배우는 것도 좋았다. 새로운 곳에서 ‘좋다’, ‘아니’, ‘맛있다’, ‘고맙다’, ’ 안녕’ 정도의 말은 외워 현지인과 소통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남편은 뇌 구조에서 언어기능은 조금 고장이 나 있다고 볼 수 있다. 같은 말을 백번 들어도 입으로 내뱉질 않으니 언어의 종류를 불문하고 말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남편이 잘하는 것은 분석하거나 파헤치고 꼼꼼히 따져보는 일이다. 내가 못하는 일 중 하나이다. 우린 톱니바퀴처럼 서로 잘하고 못하는 것이 분명했는데 잘하는 것은 한 사람에게 거의 몰아주기 식이 되어 버리니 서로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이유는 이 역할 분담이었다. 24시간을 함께 하다 보니 가끔은 이런 건 남편이 좀 알아서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다. 비행기 티켓을 산다거나, 숙소를 알아보고, 다음 여행 장소를 물색하는 일, 일자리를 찾는 일이 내 몫이라면 길상이는 빨래, 식사 준비, 지도보기, 차량이 있는 경우 운전하는 역할을 했다. 나는 내가 더 많은 일을 한다고 생각했다. 여행을 주도적으로 계획하는 것도 나였다. 가끔은 의문이 들었다.

‘길상이는 자신이 원하는 여행을 하고 있을까?’

돈과 시간을 써가며 모험을 하는 중이었는데 길상이가 원하고 있는 것을 하는지 늘 궁금했다. 난 거기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듣길 원했지만 그는 늘 ‘그렇다’라고 단답으로만 얘기하는 편이었다. 또 속이 뒤집어지게 답답하다. 이런저런 이유로 나는 가끔 남편을 쥐 잡듯이 잡았다. 나는 남편이 말이 없는 성격이라 좋은 것인데 이젠 말이 없다고 복장 터져하는 내 모습을 보는 것도 고역이었다. 나는 왜 이 모양일까.


길상이는 가고 싶은 곳이나 하고 싶은 것이 나보다는 적었다. 심지어는 주로 집에서 쉬고 싶어 했다. 세계여행을 갔는데 숙소에서 쉬고 싶다니.. 돌아다니고 싶어 죽겠는 나와는 달리 길상이는 여행도 주 5일제를 추구했다. 여행기간이 길어질수록 길상이는 쉬고 싶은 날이 더 많아졌는데 난 길상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저자식은 왜 저 모양 일까.


세 번째 이유는 내가 배고픔을 못 참기 때문이다. 새로운 곳에 도착해 숙소를 찾는 와중에 배가 고프면 나는 식당에 들어가 밥부터 먹어야 한다. 1시간 늦게 간다고 숙소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 해가 떨어진 밤이 아니고서야 나는 늘 밥이 우선이다. 그에 반해 길상이는 배고픔을 모르는 남자다. 숙소를 찾아 길을 나섰다면 숙소를 찾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못한다. 경주마처럼 앞만 보는 것이다. 내가 남편의 걷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뒤쳐지든 말든 그것을 중요하지 않다. 길상이는 숙소를 찾도록 프로그래밍되어있는 공감능력 제로의 AI일 뿐이다. AI는 내 텅 빈 위장과 달달 떨리는 손을 이해하지 못한다. 일 년쯤 지나고 나니 이제는 나 혼자 빵집을 가거나 슈퍼를 들러 내 음식만 산 다음 남편에게 나누어주지 않는 것으로 작은 복수를 한다. 이렇게라도 해야 화가 풀리는데 정작 남편에게 타격감은 제로에 가까웠다. 이 세 가지 외에도 싸울 일은 널리고 널렸다. 그러므로 이 사람과 평생을 살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면 조금 긴 여행을 가보는 것만큼 좋은 방법은 없다. 길상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는 건 아니고 그냥 그렇다는 얘기다. 이해할 수 없는 이 남자가 내 남편인 건 내가 한 가장 잘한 선택이니까.


내가 길상이를 많이 좋아했던 이유는 호수 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바다처럼 파도 없이 잔잔한 물결 같은 사람. 나를 편안하게 해주는 사람. 내 주위 사람들은 그런 길상이를 답답하다거나 소심하다 평가하기도 했지만 나는 오히려 그런 길상이가 좋았다. 그의 이런 장점이 단점이 되기도 한다는 걸 여행을 통해 배웠을 뿐이다. 길상이는 본인이 뭘 원하는지 밖으로 잘 꺼내지 않는다. 그래서 길상이는 행복한 여행을 하고 있을까? 매번 물어 확인해야 했다.

에티오피아에서 남아공까지 아프리카 여행을 마치고 이집트의 다합으로 들어왔다. 흙먼지를 털어내고 조금 쉬어가야 하는 타이밍이었다. 9년 전에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곳은 아니었는데 지금은 한인촌이라 불러도 무방할 만큼 많은 한국인 여행자들이 있다. 전 세계의 여행자들은 블루홀이란 다이빙 명소를 찾아 다합으로 모였는데 그중 한국인은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도 이곳에서 프리다이빙을 배울 계획을 세웠다.

다합에 도착한 다음날 부부 여행자인 세시 부부를 만났다. 범수 오빠는 우리와 함께 아이다 2 과정을 등록했다. 강사과정까지 하겠다는 오빠의 포부는 대단했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프리다이빙 센터인 아지트에서 곧 오픈되는 강사과정에 참가하려면 그전까지 마스터 과정까지 끝내야 했기 때문에 시간이 많지 않았다. 새로운 것을 배우는 일은 늘 설렘으로 가득 찬다. 프리다이빙의 관건은 이퀄라이징이다. 고막의 압력 평형을 맞추어 주어야 통증이 사라진다. 고막에 공기를 채워 줌으로써 압력을 똑같이 맞추어 주면 된다. 훈련을 통해 다이버들은 더 깊이 더 오래 이 과정을 반복할 수 있게 된다. 프리다이빙에도 여러 종목이 있다. 줄을 잡고 수직 내려가는 종목(FIM), 줄을 잡지 않은 채 수직으로 내려가는 종목(CWT), 숨을 참는 종목(STA) 등등. 현재 CWT의 세계 신기록은 131미터이다. 사람의 몸은 상상을 초월한다. 어떻게 숨한 번으로 수심 131미터를 내려갈 수 있다는 것인지!! 아파트 한층을 3미터로 계산한다면 약 40층 정도 높이의 건물까지 왕복을 하는 것이다. 말도 안 돼!

다행히 아이다 2는 16미터만 갔다 오면 되니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세계 신기록을 운운하다가 16미터를 생각하니 그쯤이야 싶다. 바다에서 직접 16미터를 내려다보기 전까지는.. 나는 아이다 2를 딸 수 있다고 남편에게 큰소리는 쳐놓았지만 사실 자신이 없었다. 무섭기도 하고 그곳까지 내려가서 할 일도 없었다. 반면에 길상이는 프리다이빙이 체질이었다. 차분히 핀 질을 하며 아래로 더 깊이 내려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몸치인 남편이 이렇게 운동을 잘 하기는 처음이라 바다 안에서도 입이 벌어졌다. 호수 같은 남자는 사실 바다의 남자였던 것이다.


우린 이 멋진 바닷가 마을에서 조금 오래 지낼 계획을 했다. 한 달이면 충분하겠지? 바다 근처로 지낼 집들을 몇 군데 알아보았다. 집들은 하나 같이 미완성된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내부는 꽤 깔끔했다. 여섯일곱 군데의 집을 봤는데 하나 같이 해가 잘 들어오지 않았다. 한국에서 내가 집을 고르는 기준은 ‘해가 들어오는 밝은 집’이었다. 부동산 중개업자인 오스만에게 말했다.

“몇 군데 집은 너무 마음에 드는데 해가 안 들어오네요. 해가 잘 드는 집은 없나요? “

아저씨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집에 해가 들어오면 덥잖아요. 해는 늘 밖에 있어야 해요. 해가 집안에 들어오면 안 돼요.”

해는 밖에 있다는 당연한 소리를 하는 오스만 아저씨와 더 언쟁을 한다고 집이 바뀔리는 없다. 결국 바닷가에서 제일 가까운 집을 계약했다. 역시나 외관은 미완성인 집이었다. 이유를 물어보니 집이 완성되면 세금은 내야 하니 미 완성된 채로 사는 것이라 했다. 잠깐 스쳐가는 여행자한테 짓다만 집인들 어떠하랴. 그래도 해가 들지 않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리가 다합에 도착한 것은 4월 말이었는데 5월이 넘어가자 날씨는 점점 더워졌다. 에어컨 없이는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집 안은 더워졌다. 다행히 해가 들지 않는 집 안은 밖에 비해서는 서늘했지만 이내 땀이 줄줄 흘렀다. 해는 밖에 있어야 한다는 오스만의 말이 맞았다. 외국인들이 사는 집들만 에어컨 실외기가 돌아갔다. 이곳 사람들은 에어컨이 없이도 잘 지냈다. 날씨라는 게 원래 이런 것인데 웬 유난이냐고 말하는 것 같았다. 현지인들이 사는 집 중에는 지붕도 없이 나무를 대충 얼기설기 엮은 것이 다였는데 사막 생활에 익숙한 베드윈 유목민족의 생활 습관이라 했다. 어차피 이곳 시나이 반도에 비 오는 일은 거의 없으니 지붕이 막혀있을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에어컨을 찾지 않아도 될 만큼 서늘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루는 우리 집 앞마당에 카펫을 펴고 남자 여럿이 잠들어 있었다. 말 그대로 노숙이었다. 밤에 슈퍼를 가려고 문을 열었다가 이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저씨는 친척들이 가끔 놀러 와 마당에서 자는 것이라 했다. 라마단 기간이라 유독 손님이 많았다. 마당 한가운데 차를 끓이고 그 주변으로 카펫을 둥글게 깔고 모여 앉아 식사를 하고 밤에는 그대로 잠을 잤다. 이 모든 생활 모습이 이곳에선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어느 날 밤, 충전하여 사용하는 전기세가 바닥이 나는 바람에 밤새 전기를 사용할 수 없었다. 한밤중에 에어컨이 꺼지니 더워서 다시 잠에 들 수 없었다. 혹시나 싶어 밖으로 나가 빈 마당의 카펫 위에서 잠이 들었는데 시원한 자연풍이 불어왔다. 가끔 눈이 떠지면 별이 보였다. 건조하면서도 시원한 바닷바람은 예민한 아기라도 잘 수 있을 만큼 편안했다. 길상이는 밖에서 자는 건 무섭다고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집안에서 기어코 잠을 잤다. 나는 이곳의 삶의 방식이 꽤 마음에 들었다. 뜨거운 낮은 집안이나 바닷속에 머물렀고 선선한 밤은 밖으로 나왔다. 바다와 함께 여유 있고 느린 삶을 사는 곳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그 후로 늘 전기세를 꼬박꼬박 빼먹지 않고 충전했다.

해가 들지 않는 집의 주인

우리 집에서 20분을 걸어가면 ‘아쌀라’라는 시장이 나왔다. 가는 길에는 달콤한 과자를 파는 제과점도 있었다. 나는 늘 이 제과점을 들러 약과 맛이 나는 과자를 가득 샀다. 직원들은 매일 같이 간식을 사는 나에게 거의 모든 종류의 과자를 맛 보여 주었는데 그때마다 그곳 주민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할 일이 많지 않은 다합에서 제과점을 들른 뒤 아쌀라에 가는 일은 하루 중 중요한 일과였다. 시장에서는 배추와 무, 쪽파를 구할 수 있었는데 이 재료들로 매주 김치를 담았다. 귀한 고춧가루를 조금씩 아껴 써야 했지만 김치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행복했다. 마트에는 중국 식품들이 많았는데 액젓과 미원 같은 여러 재료들을 쉽게 살 수 있었다. 이 바닷가 마을에서 우리가 못 해 먹는 음식은 없을 정도였다. 단 돼지고기만 빼고.

고기를 원래 즐겨먹지 않는 우리지만 가끔은 돼지고기가 미치도록 먹고 싶기도 했다. 이곳에서 구할 수 있는 고기는 닭과 양고기뿐이었다. 이슬람 국가에서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하는 관습 중 하나였다. 다합은 외국인들이 많아 옷차림이나 술, 모든 것이 자유로운 편이었지만 고기만큼은 구할 길이 없었다.

제과점의 간식


내가 새로운 곳에 익숙해질 무렵 길상이는 프리다이빙에 빠져들고 있었다. 프리다이빙을 더 잘하기 위해선 명상을 통한 마인드 컨트롤이 중요해 보였는데 길상이는 삶 자체가 명상처럼 고요한 사람이니 잘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남편은 인생 운동을 찾은 것이다. 본인 스스로도 매번 놀라는 눈치였다. 꼬드김과 고민의 밤을 며칠 보내더니 남편은 범수 오빠와 함께 강사과정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한 달만 쉬다가 가려고 한 곳이었는데 강사과정까지 끝내려면 최소 두 달은 다합에 살아야 한다는 말이었다.

“나 프리다이빙 강사과정까지 하고 싶어.”

하고 싶은 게 별로 없던 남자가 탱화를 그리겠다는 이후로 또 뭔가를 하겠다고 진지해졌다. 나는 남편이 범수 오빠의 꼬드김에 넘어간 것 아닌지 의심했지만 길상이가 한 이 말은 진심이었기 때문에 말릴 방도가 없었다. 다이빙 얘기를 하며 들뜬 길상이의 모습은 참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었다. 여행도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설렘이 줄어든다. 뭐든 신기하고 두근거리던 때를 지나고 있을 쯔음 다이빙을 배운 뒤 남편은 다시 생기를 찾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길상이는 매일매일 하루도 쉬지 않고 다이빙을 했다. 16M를 가뿐히 통과하고 아이다 2를 따고 며칠 지나서는 23M를 갔다 오더니 이젠 30미터까지… 아이다 마스터 과정까지 끝내고야 말았다. 남편은 그야말로 재능충이었다. 다합에서 이런 재능을 발견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아마 여행을 하지 않았다면 평생 몰랐을 길상이의 능력이었다. 스테틱이라는 숨 참기 시험에서는 4분을 참아냈다. 몇 주만에 이제 나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엄청난 다이버로 성장해 있었다. 길상이의 능력이 부럽긴 했지만 나는 10M 근방을 내려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산호 벽을 따라, 물고기 떼 사이를 가르며 바다 아랫 속을 헤엄친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었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아쌀라에 가거나 책을 읽는데 썼다. 해안가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집에서 요리를 했다. 김치도 만들고, 만두도 만든다. 밀가루 반죽을 곱게 펴 직접 담근 김치를 잘게 썰어 김치만두도 만든다. 그럼 만둣국도 만들 수 있다. 이집트 다합 시골마을에서 뭘 먹고사나 하겠지만 한국보다 더 많은 한식을 만들어 먹는다. 먹고, 책 보고, 요리하고, 이른 아침 수영이나 해 질 녘 수영 한 번으로 하루가 끝난다. 홍해에서 하는 수영은 발리나 몰디브보다 훨씬 더 황홀하다. 바닷속의 산호의 빛깔도 다른 곳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하다. 바다 위로 맞은편 사우디 아라비아의 능선이 보였다. 해 질 녘쯤에는 그 능선 위로 달이 떠올랐는데 파랗던 바다는 한순간에 붉게 물들었다. 그 모습은 바다에 뜬 채 보고 있노라면 자연이 주는 기쁨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모세는 이집트를 떠나(출애굽) 40년 동안 시나이 반도 주변을 떠돌았다. 사우디아라비아를 마주 보며 수영을 하고 있으면 그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모세도 다합에 와서 이 풍경을 봤을까?  이곳에서 쉬어갔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이 아름다운 곳에서 잠시라도 쉬었을 것이다.

‘내가 홍해에 떠 있다니…’

이곳에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수영실력이 늘었다. 맨몸으로도 바다 멀리까지 수영을 나갔다. 오리발이 있으면 더 빨리 헤엄칠 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이곳에서 자란 다합의 베드윈족 까지는 아니어도 바다 사람이 되고 가고 있다 느꼈다.

해질 무렵의 홍해, 멀리 사우디아라비아가 보인다

강사과정이 시작되면서 길상이는 더 바빠졌다. 나는 소소한 집안일밖에 없었기 때문에 넷플릭스를 보기 시작했고 사람들과 더 많이 만났다. 여유로운 생활도 점점 질려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소일거리를 해보기로 했다.. 다합의 특성상 너무 아침 일찍, 혹은 밤늦게 버스가 도착하기 때문에 장기로 머물 집을 구하기 위해선 하룻밤 머물 곳이 필요했다. 우리 집은 방 하나과 거실 하나가 있었지만 방 하나는 사는 동안 거의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거실은 부엌과 함께 있어 공간이 더 크고 편했지만 방은 침대 하나가 전부였다. 그래서 하루 이틀 동안 부부 여행자들에만 안방을 내어주기로 했다. 덕분에 거의 매일 한 팀을 받아 무료 셰어하우스를 운영하게 되었다. 심심하던 찰나 찾은 일거리였다. 각기 다른 이유로 다른 가치관으로 하는 여행은 매일 밤이 새도록 듣고 또 들어도 흥미로웠다. 자전거로 여행하던 토닥 부부, 스포츠 관람을 많이 하던 곰 부부, 봉사에 관심이 많던 엘리샤 데이비드, 티격태격하는 모습이 너무 웃겼던 함피 부부 몇 쌍의 부부와 하룻밤을 지냈는지 모를 지경이다. 다합에서는 이런 작은 일들이 살아가는 활력소가 된다.


내가 다합의 주민이 다 되었다 생각했을 무렵 남편의 프리다이빙 강사과정은 끝이 났다. 최고 기록 40M를 기록하며 강사 자격을 받게 된 것이다. 꼬박 두 달이 걸렸지만 자격증을 순탄하게 딴 편이라 했다. 하긴 나 같이 16미터도 못 내려가는 사람이 있으니... 숨을 한 번 들이마신 뒤 바다 깊이 40미터를 내려가는 일은 결코 만만하게 볼 일이 아니다. 아파트 13층까지 줄 하나에 의지해 한 숨으로 왔다 갔다 하는 셈이다. 상상만으로도 엄청난 일을 길상이는 해냈다. 물론 세시 부부의 범수 오빠도 함께 해냈다. 두 달 동안 밥만 먹고 다이빙만 했더니 둘 다 강사가 된 것이다. 맙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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