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진기로 듣는 소소한 이야기 #3
하나의 단어 안에는 함축된 의미가 있다.
한 가지 음식을 그 음식에 걸맞은 그릇에 정갈하게 담아내는 것처럼, 같은 언어를 쓰는 문화권에서는 서로가 약속한 한 가지 의미를 가장 어울리는 단어에 담아내는 것이다. 그렇게 담긴 단어의 의미는 김치가 옹기 속에서 익어가고 숙성되는 것처럼, 그 단어 안에서 오래오래 천천히 익어간다.
'오이'를 영어 단어로 뭐라고 할까? 답은 'cucumber'이지만, 이 단어는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오래전, 어느 유명한 영어강사가 이렇게 영어공부를 하라고 했던 것이 기억난다. 처음부터 어려운 단어를 공부하려고 하지 말고, 내가 이해하고 이미 알고 있는 아주 쉬운 단어들의 조합을 가지고, 생소하고 어려운 단어를 설명해 보려는 시도를 해 보라고 말이다.
그렇게 하다 보면 단순히 단어를 외우는 공부에서 벗어나, 그 단어가 지닌 본래의 속성과 아름다운 의미에 도달하게 되는데, 그때부터 영어가 더욱 재미있어질 거라고 말이다.
'오이'라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 'cucumber'라는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다면, 또한 ‘오이’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 ‘오이’를 설명하고자 한다면, 마치 판소리의 한 장면처럼~
(뚜둥 딱) “크기는 아그들 팔뚝만~허고, 기~다란 막대기처럼 생겼는디, 겉면은 오톨~도톨 깨알처럼 만져지는 돌기들이 있고, 겉은 그걸로 맞으면 아플 정도로 단단~허고, 겉면의 색깔은 갓 피어난 새싹의 연~한 색으로부터 시작~혀서 진~헌 초록색으로 마치는디(얼~쑤), 한입 베어 물면 톡~하고 부러지면서, 아삭~하니 씹히는 탱글한 속살을 지니고 있고, 그 사이사이에는 아침 호숫가 나뭇잎에 맺히는 조그마~한 이슬방울과 같은 투명한 씨앗이 쭈루루루루~피아노 건반처럼 가지런~허게 박혀 있는, 한여름 계곡 시원한 물가에 가면 맡을 수 있는 물냄새가 나는 신~기한 열매”(쿵~딱)
~라고 표현해 보는 것은 어떨까.
불가피하게 환자들에게 어려운 의학 전문용어를 써야만 할 때가 있다.
진단명이 그러하고, 수술명이 그러하고, 그 진단과 수술을 결정하기 위해 동원되는 여러 검사법들의 용어들이 그러하고, 그 하나하나 세부항목의 내용을 설명하고자 하면, 산넘어 산, 그야말로 첩첩산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는 한 단어를 '그저 내뱉으면 되지'라는 편한 유혹의 길을 선택하지 않아야 한다.
전문용어를 쓰는 것이 뭔가 조금 더 권위가 있어 보일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안에 담긴 '내용'을 설명하지 않는다면 환자에게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그저 외계어를 전달할 뿐이다. 의학 전문용어는 전문가들 사이에 협의된 약속이지, 의사와 환자 간에 협의된 약속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환자들에게 어떤 단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길고 긴 이야기의 여행을 떠나야만 한다.
때로는 A4 용지를 가득 채우는 그림을 그려야 할 때도 있고, 환자가 이해할 만한 온갖 예시와 비유를 섞어서 이야기를 전달해야만 할 때가 있다.
어찌하든지 우리 몸 안에 실재하면서도 눈으로 본 적이 없는 ‘척추’에 도달하기까지, 현실적으로는 눈에 보이는 ‘등짝’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렇게 기나긴 설명을 이어가다 보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여러 가지 비유를 통해 설명하셨던 장면이 떠오른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을 닮아간다고 해야 하나?)
언젠가부터 복음을 전하는 과정 속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요한복음 3장 16절만 하더라도 '하나님', '세상', '사랑', ‘독생자’, '믿음', '멸망', '영생'과 같은 단어들이 쏟아진다.
우리에게 주어진 소중한 선물과 같은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이 같은 단어 안에 담겨 있는 아름다운 의미들이 잘 전달되어야 할 텐데, 언제나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 같아 늘 하나님께 죄송하고 송구하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서 눈멀고 귀먹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역사하심이 작용을 해야만 그 복음이 비로소 보이고 들리게 되는 법이다.
그러나, 그것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 복음을 전달하는 사람이 - 환자들에게 전문용어를 마구 날리는 의사처럼 - 전도 대상자들에게 비슷한 일들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이러한 의구심을 버리지 못하게 되는 이유는, 기독교 용어를 익숙하게 쓰는 교회 안에서도 그 의미가 와전되는 현상을 종종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聖)스러운(?) 단어를 차용해 쓰기만 하면 그 전체 내용이 성경과는 전혀 상관없는 내용이거나, 심지어는 반(反) 성경적인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일고의 고민도 없이 “할렐루야, 아멘!” 으로 모든 것이 종결된다.
‘이게 무슨 일이지?’라는 의문이 들면서, 어느덧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단어에 함축된 거룩한 약속마저 우리가 원하는 내용으로 바꿔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바른 복음이 전달되며, 바른 신앙으로 자라나기 위해서는, 이런 단어 안에 담긴 본래의 약속과 의미를 자세하고도 철저하게 탐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것도 하나님이 인간과 약속하신 그 약속 안에서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단어의 우상숭배에 빠져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도, 진료실 안에서는 치열한 두뇌 싸움이 벌어진다. 어떻게 하면 환자들에게 그 내용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적절하고도 쉬운 단어들을 선택해야 하는 것일까?
'등짝'과 '척추' 사이에서, 오늘도 고민이 깊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