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사람의 익숙한 온도

by 자기계발중독자

#4. 낯선 사람의 익숙한 온도

"죄송하지만, 이만 가보겠습니다. 약속이 있어서요."


그녀가 예의 바르고 건조하게 고개를 숙이고 돌아섰을 때였다. 덜컥. 손목이 잡혔다. 거칠거나 위협적인 힘이 아니었다. 마치 벼랑 끝에서 지푸라기를 잡는 사람처럼, 손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안 돼."


LY가 젖은 눈으로 그녀를 붙들고 있었다. 성인 남자가, 그것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지하철역 한복판에서 아이처럼 울고 있었다.


"어느 날 다시 너를 만난다면... 다시는, 절대로 널 놓치지 않겠다고 수없이 다짐했어. 꿈속에서조차 연습했어. 그런데 너는 아무것도 기억 못 한다고 하고... 나는 널 또 이렇게 눈앞에서 놓칠 수는 없어."


그의 눈물 한 방울이 그녀의 코트 소매 위로 떨어졌다. 뜨거웠다. 그녀는 타인의 감정에 무딘 편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눈물은 그녀의 피부를 뚫고 들어와 심장 어딘가를 욱신거르게 만들었다. 기억은 없는데 통증은 있었다.


"잠깐이면 돼. 제발... 잠깐이라도 좋으니 얘기 좀 해."

그의 애원에 그녀는 난처한 표정으로 시계를 보았다. 정말로 다음 일정이 있었다. 그녀는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지금은 정말 가봐야 해요. 번호... 교환하죠."


그것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방편이었지만, LY에게는 구명줄과도 같았다. 떨리는 손으로 번호를 저장하는 그를 뒤로하고, 그녀는 도망치듯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등 뒤에서 그가 계속 서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자꾸만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날 이후 며칠이 지났다. 그녀의 일상은 다시 잔잔한 호수처럼 돌아왔다. 출근하고, 일하고, 퇴근하고. 하지만 문득문득 지하철역의 그 남자가 떠올랐다.

내 결혼식에 신랑이 오지 않았다는 걸 알고 오열하던 낯선 남자.

그리고 늦은 저녁,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저장된 이름 [LY]. 그녀는 잠시 화면을 응시하다가 메시지를 열었다


[잘 지내니?]

짧은 첫 문장에 이어, 긴 문장이 화면을 채웠다.

[그날 눈이 많이 왔잖아. 유난히 추운 날이었는데 코트가 얇아 보여서 걱정했어. 안색도 너무 창백해 보였고... 감기는 안 걸렸는지 계속 신경이 쓰인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옷차림을 내려다보았다. 가족조차, 친구조차 무심히 넘기던 나의 안색과 얇은 옷차림.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세상에서, 유일하게 나를 걱정하는 타인.


[갑작스러워서 놀랐을 텐데 미안해. 하지만 언젠가, 한 번은 제대로 만나서 못다 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 네가 잃어버린 그 시간 속에 내가 있었으니까.]


문자는 정중했지만 간절했다.

그녀는 침대에 걸터앉아 그 문자를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잃어버린 시간 속에 그가 있었다면, 그는 내 잃어버린 기억의 열쇠일까, 아니면 판도라의 상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