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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은실 Aug 02. 2023

집, 그리고 사물이 주는 행복

인간의 본성과 욕구 - 아늑한 집과 사물의 관계에 대하여

학창 시절, 나는 유난히 절약정신이 투철했다. 편의점에서 1+1 행사가를 적용 중인 음료를 사서 마셨고, 다이소에서 생필품을 고를 때에도 가장 저렴한 상품을 집어 들곤 했다. 그때의 나에게 돈을 지불하고 구매해야 하는 사물들의 선택 기준은 '얼마나 저렴한가'였다. 품질이 너무 좋지 않아서 금방 버리게 되어 버릴 정도가 아니라면 저렴한 것이 우선이었고,  외에 다른 조건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직장인이 되어 스스로 돈을 벌기 시작한 뒤부터는 물건고르 방식에 큰 변화가 생겼다. 바로 고심 끝에 좋은 물건을 구매하는 것이다. 좋은 물건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전자기기라면 좀 더 다양한 기능을 가진 고사양의 제품이 될 수 있고-비록 그 기능을 자주 활용하지 않더라도-, 옷이라고 한다면 피부에 닿을 때의 촉감이 더 좋은 소재의 천을 활용한 제품이 될 수도 있다. 다만 이 '좋은 물건'이라는 것에는 당연히 보통의 물건보다 추가적으로 경제적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의무가 따라붙게 마련이다.


물론 경제력에 한계가 있기에 모든 물건을 좋은 것으로만 장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기에 내가 좋아하는 분야의 것들에 한해서만 작은 사치를 허락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취미생활을 위해 테니스채와 운동복만큼은 최고로 좋은 것을 구매할 것이다. 또 다른 이들은 먹는 것에 큰 가치를 두고 있어서 비싸더라도, 채소 하나를 사 먹더라도 유기농 또는 저농약 상품만을 고집할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타협이 불가능한, 좀 더 느슨하게 이야기해서 '이것만큼은 신경 쓰면서 살고 싶다'라고 고집하고 싶은 것은 '아늑하고 예쁜 집과 그 안의 사물들'이다.





벽에 걸려 있는 두 개의 그림은 미국 초현실주의 사진작가 만 레이(Man ray)의 포스터 작품이다. 만 레이를 알게 된 계기는 이렇다. 2022년 5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그의 작품 '앵그르의 바이올린'이 1,241만 달러에 낙찰되면서 '세계에서 가장 비싼 사진'이 되었다는 소식을 뉴스로 접했다. 흥미로운 마음에 그의 작품 몇 가지를 검색해 보았다. 나의 취향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기에 만 레이라는 위대한 작가는 바로 내 관심 밖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얼마 뒤, 빈티지 포스터를 취급하는 국내 화랑 두 곳을 통해 만 레이의 색다른 작품 두 개를 알게 되었다. 그는 복숭아 세 개, 그리고 서양배 하나를 나무틀 안에 넣어 상자를 꾸민 뒤, 그 상자를 사진으로 찍어 다시 포스터 작품으로 인화했다. 카메라 셔터 한 번으로 작품활동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액자 안의 액자' 구성의 작업 방식이 매우 신선했다.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색감의 배경에 반해 나는 그날 처음으로 '거실 벽에 미술작품을 걸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두 작품을 국내에서 구입하기에는 가격적인 무리가 있었다. 해외에서 직구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나는 구글 검색의 굴레에 빠져들었다. 결국 프랑스의 한 화랑에서 만 레이의 포스터를 갖고 있는 것을 발견했고, 화랑 홈페이지에 기재되어 있는 대표 메일에 떨리는 마음으로 문의를 남겼다. 짧은 영어 실력에도 불구하고, 화랑 관계자와 몇 번의 메일 끝에 만 레이의 작품 두 점을 거실 벽에 걸 수 있게 되었다.





사진은 빈티지 가구 애호가들 사이에서 한참 인기를 끌었던 알리버트(Allibert) 사의 원형 거울이다. 거울 뒷면에는 전구가 있어서, 점등하면 둥그렇고 얇은 띠의 도넛 모양으로 빛이 발산된다. 빈티지 제품은 어디까지나 중고 제품이기 때문에 수급이 원활하지 않다. 보통 국외의 중고 시장에 빈티지 제품이 입고되면, 국내 딜러가 이를 수입하여 판매하는 방식이다. 그렇기에 국내에서 수요가 많은 제품의 경우에는 몇 달, 아니 몇 년을 기다려야 원하는 제품을 찾을 수 있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이 거울을 구매했던 것에도 나름의 추억이 있다. 빈티지 딜러의 상품 페이지 업데이트를 아마 6개월도 넘게 지켜보았던 것 같다. 그렇게 반년을 노력한 끝에 재고를 갖고 있는 판매자를 찾았고, 마침 판매자의 스튜디오가 출장지 근처에 있어서 출장 일정이 끝나는 시간으로 약속을 잡았다. 출장지에서 회의가 끝나자마자 스튜디오를 찾아갔고, 이 거대한 거울을 품에 안고 KTX에 올라 집에 오던 때의 설렘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보통의 사람들, 그리고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안내해 주는 멘토들은 '물건에서 얻는 행복은 가짜 행복'이라고 말한다. 물건을 원하는 감정은 그 물건을 얻게 되었을 때 찰나의 순간으로만 머문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된다고 한다. 우리 근처의 아이만 봐도 그렇다. 장난감 자동차를 좋아하는 어린아이에게 포클레인을 사 주면 1주일은 즐겁게 놀 것이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뒤 아이는 포클레인에 흥미를 잃고, 이번엔 덤프트럭을 사 달라고 할 것이다. 인생의 멘토들은 사물이 채워주는 행복은 휘발성이라고, 진짜 행복은 관계와 헌신, 그리고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한다.


나는 이 진리를 부정하고 싶지 않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에서 재산, 물질, 권력을 '소유'하는 것에 가치를 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능동적으로 발휘하고 스스로의 삶을 기쁘게 살아냄으로써 '존재'하기를 이야기하고 있다. 한 개인의 인간성과 정체성은 그 개인의 내면에서 나오는 것이지, 그가 가진 물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님을 인정한다. 고급 세단을 스스로의 정체성으로 인식하고 있는 회사원 A 씨는 교통사고로 인해 스스로의 차가 전손되었을 때 정체성을 잃어버렸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몇 달치 월급을 모아 명품 가방 하나를 마련한 B 씨가 실수로 그 가방을 잃어버렸을 때 정체성을 잃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다. 없어진 것은 물건이지, 한 인간의 본성과 인간성이 아니다. 개인의 아이덴티티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벌거숭이 몸과 마음에서도 흘러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존재에서 방향을 틀어 '소유에서 오는 행복'에 초점을 맞춘다면 이야기가 살짝 달라진다. 인간에게는 여러 가지 욕구와 본성이 있다. 그리고 그 본성의 형태를 사람마다 다르기 마련이다. 실험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는 그의 저서 빈 서판(Blank Slate)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인간은 빈 서판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끝나지 않는 본성-양육 논쟁에서 양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들은 '인간은 새하얀 도화지인 채로 태어나기 때문에 모든 것은 교육, 외부환경을 통해서 변화시킬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인간은 본성을 타고난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의 본성에는 과거 몇십, 몇 백 만년의 진화의 역사가 녹아 있다.




나의 유전자에는 생존하기 위해 끊임없이 사냥해서 먹이를 얻고, 천적으로부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발버둥 친 유인원의 DNA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나의 본성에는 '가장 안전한 은닉장소를 찾아 움막을 옹성처럼 견고하게 건설하고, 그 안을 생활하기에 적절하도록 설계해서 외부의 침략을 막고자 하는 유인원의 DNA'가 더 많은 것 같다. 그리고 그런 본성은 현재를 살고 있는 나에게 '집꾸미에 대한 지대한 관심'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만일 나의 본성과 뇌의 설계도가 아늑한 집과 그 안의 유용하고 아름다운 사물로부터 안정감을 얻는 방향으로 디자인되어 있다면, '사물이 주는 행복'을 가짜 행복이라고 무시해 버릴 것이 아니라, 그 욕구를 어떻게 하면 건강하게 실현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좀 더 섬세한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집에서 어떤 주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시간을 보내고 싶은지. 내가 가치를 두고 있는 영역은 무엇인지. 나의 심미안은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 내 취향은 무엇인지. 그리고 나의 경제적 기반은 어디까지 내 취향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고민해 보아야 한다. 본인에게 있어서 아늑한 집의 형태는 무엇인지, 그리고 그 안에 채워질 사물들은 어디까지가 필수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즉, 집 꾸미기에도 철학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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