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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은실 Sep 13. 2023

할머니의 자개장과 다섯 살 아이가 그린 그림

집꾸미기의 정수: 시간이 묻어나는 것, 내 손으로 만든 것

인테리어 재료에는 각종 가구와 소품들, 식물에서 수집품까지 그 종류가 다양하다. 그런데 개중에서 집꾸미기의 정수가 되는 재료라고 하면 어쩐지 소중한 사람과의 시간이 묻어난 것들, 내 손으로 직접 만든 물건인 것 같다. 일단 집을 꾸민다는 것은 '그 안에 살고 는 사람에게 맞게 집 안을 설계한다는 것'인데, 그 사람이 직접 만든 가구가 있다면 그게  최고의 재료 아니겠는가. 소중한 사람의, 또는 그 사람과의 추억이 깃든 물건도 마찬가지다. 아무런 추억이 없는 새 물건이 아니라 정서적으로 깊은 유대관계를 지닌 누군가의 숨결이 깃든 물건 당연히 멋진 재료가 된다.


예를 들어 할머니의 자개장,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두껍고 무거운 유기방짜 그릇 몇 개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 물건에는 새것에서는 찾을 수 없는 손때와 그때만의 감성, 추억이 깃들어 있다. 영화나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벽에 아이의 키를 잴 때마다 표시한 눈금은 또 어떠한가. 그 아이가 크레용과 파스텔로 그린 그림도 마찬가지이다. 아이의 생각과 희망이 담긴 성기고 순수한 선과 색감은 갤러리에서 구매할 수 없는 작품이다. 내가 직접 만든 나무 책상과, 전구에 천을 둘러 간단히 만든 조명 직접 그린 그림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세상에 하나뿐인 것이다.




정서와 시간이 묻어나는 것


사연이 있는 것, 애정이 묻어나는 것과 함께하는 것은 아무런 추억이 없는 물건을 사용하는 것보다 멋진 일이다. 젊은 시절 뜨개질을 좋아했던 엄마가 짜 준 냄비받침대 두 장은 지금도 부엌에서 아주 요긴하게 쓰이고 있다. 냄비받침을 쓰는 순간마다 엄마를 떠올리는 것은 아니지만, 어째 그 물건은 나도 모르게 아껴서 쓰게 된다. 올이 나갈세라 후크에 걸어두지 않고 수납장 위에 두고 식사 때마다 쓰고 있다. 지금은 뜨개실 사이의 화려한 무늬들이 뭉개져버렸지만 가끔 가다 실올 사이의 맺음 방식을 보고 있으면, 우리 엄마는 '젊은 시절에 참 재주가 많았구나'하고 한 번 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어느 누군가 선물해 준 물건도 멋진 재료이다. 그 사람이 내 취향을 생각하며 어떤 것을 좋아할지 고민했다는 사실은 고맙기 그지없다. 시중에는 많은 물건들이 넘쳐난다. 그것도 품질 좋고, 디자이너가 고심해서 만든 물건들이 말이다. 풍요의 시대 속에서 소비자는 괜찮은 사물들의 바닷속에서 즐겁게 선택만 하면 되는 상황이다. 하지만, 거기에 누군가가 나를 생각하는 마음, 나와 깊이 연결되어 있는 사람의 시간과 정(情)이 한 층 더 보태진 물건은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물건을 바로 '귀하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10년 전쯤에 한 번은 집 안의 그릇을 모두 새로 사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 자취하는 자식이 집 안에서 챙겨 먹고살지 않을까 봐 엄마는 본인의 집에서 쓰던 집기류를 이것저것 챙겨주셨는데, 자취방을 꾸미기 시작한 뒤부터는 어째 모양도, 색도, 소재도 제각각인 가재도구들이 마음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 뒤로 그릇을 구매할 수 있는 상점에 들를 때마다 새하얀 포셀린 그릇을 몇 번이고 보았지만 어째 사려고 하니 기분이 내키지는 않았다. 글쎄… 자취방의 식탁이 더 깔끔해질 수는 있다지만 새로운 그릇들은 내가 밥을 굶지 않기를 바라는 누군가의 마음이 어려 있지 않은, 그다지 귀한 물건은 아니라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옛날 할머니가 쓰시던 물건들은 그때만의 분위기가 있다. 그 분위기가 디자인의 형태에서 오는 것이던, 살짝 빛바래고 낡았지만 농후한 파티나 1) 에서 오는 것이던, 아니면 현재에는 많이 찾아볼 수 없는 희소성 있는 모양새 때문이건 간에 우리는 색다른 것을 즐기고 여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시대적으로 다른 시기에 제작된 사물들이 중첩될 때면 그것들의 조합에는 풍부함이 보인다. 또, 나 개인의 일관된 취향뿐 아니라, 그 물건을 물려주신 또는 선물해 준 다른 사람의 다른 취향들이 역시 섞여 있는 모습은 굉장히 다채롭다.


사진은 덴마크에서 전후 시기 생산된 고운 티크목의 거실장 위에 검은색의 자개문짝 하나와 반들한 플라스틱 조명, 그리고 장 안에는 일본 친구가 선물해 준 히나닝교 2) 를 넣어 둔 모습이다. 어째 다 다른 물성과 배경을 갖고 있지만 그 모습이 주는 적당한 균형과 어울림이 참 마음에 든다.




직접 만든 것


유행은 돌고 돈다. 디자인, 인테리어 트렌드 역시 바뀌고 또 바뀐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고 했던가. 바꿔 말하면 가장 나다운 것이 가장 앞서가는 것이고 가장 세련된 것이다. 내가 살 집에 내 손으로 만든 가구를 놓고, 내 손으로 빚은 도자를 두는 것은 두 번 말하지 않아도 참 멋있는 일이다. 실력이 좋은 사람이라면 본인이 머릿속에서 상상한 디테일을 그대로 구현할 수 있는 것은 덤이겠다.



나 역시 무엇인가 그리고 만드는 것을 좋아해서 집에 DIY 장식이 꽤 있는 편이다. 한 번은 키우기 어렵거나 너무 희귀해서 구하기 어려운 식물, 좋아하는 식물을 그려서 표구를 맡기기도 했다. 마치 그 식물들을 실제로 잘 키워낸 것 같아서 절로 흐뭇해지는 그림이었다. 직접 만든 물건은 나에게 현재 필요한 부분이 무엇인지, 부족한 부분은 무엇인지, 내게 감동을 주는 것은 무엇인지와 같은 것들을 세상에서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만든 것이다. 할머니가 주신 자개장과 내 아이가 그린 그림이 감동적인 만큼, 가장 소중한 나 자신이 정성스럽게 만든 것들도 그만큼 감동을 줄 수밖에 없다.



나의 취미 중 하나인 마크라메도 좋은 벽장식거리가 된다. 바닷물에 오랜 시간 절여진 유목(流木) 하나를 벽에 걸고 하염없이 실을 이리저리 매듭짓고 있으면 며칠이 지나 어느덧 작품이 하나 완성된다. 가끔씩 오며 가며 작품을 보면 '저 부분의 꼬임은 어떻게 짰더라, 이 부분은 우연히 나온 모양이었지, 실의 색을 달리했으면 좋았으려나'하고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하게 되는데 이게 꽤 재미가 있다. 나중에 저 정도 크기의 마크라메 작품을 시중에서 사려면 몇십만 원은 지불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재미도 쏠쏠했다. DIY의 장점 중 하나가 훨씬 저렴한 가격에 원하는 것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적이거나 공예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서 DIY를 못할 것은 아니다. 밖에서 활발하게 서핑을 하는 사람이라면 서핑보드 아랫판에 크게 사인을 해서 벽에 걸어둘 수도 있고, 접이식 자전거를 즐기는 사람은 자전거를 접어서 둘 수 있는 수납장의 패널을 원하는 대로 맞추어 가구를 제작할 수도 있다. 어디 처음부터 끝까지 만드는 것만 DIY인가. 이 정도 DIY가 딱 한 방울만 묻어있는 물건이라도 다른 것들보다 훨씬 더 정이 들 것이다.


인간은 먼 옛날 비로소 두뇌가 커지고 지능이 높아져 도구를 활용하게 되었으며, 만물의 영장에 가까워짐에 따라 어느 정도 먹고살기가 수월을 때 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예술, 유희, 놀이는 인간의 본성이자 사치 행위가 되기도 하고, 인간의 삶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를 한 층 더 끌어올려 준다. 집에서, 공방에서 사부작거리며 고급스러운 유희활동을 한 뒤에 그 결과물로 집을 장식하는 것은 과연 인테리어 재료 중에 으뜸이라고 할 만하다.



1) 파티나(Patina): 원래는 동 제품이 시간이 지날수록 산화되어 살짝 청록색으로 보이는 표면을 말한다. 하지만 여기서 확대되어 오래된 가구나 물건의 표면에서 나타나는 특유의 느낌을 나타내는 의미로 더 많이 쓰이고 있다.

2) 히나닝교(ひな人形·雛人形): 여자아이가 건강하고 예쁘게 자라고 미래에 행복해지기를 기원하는 축제일에 제단이 올려놓는 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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