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당연필 한 자루

by 서지현
각종 문구가 빼곡히 꽂힌 문구 수납함


아이방에 있는 문구 수납함이 빼곡하다. 그 안에는 필기구나 미술 도구 등 각종 학용품이 넉넉하게 꽂혀 있다. 대개가 쓸모의 끝을 알 수 없는 문구들이다. 이를테면 속이 보이지 않는 튜브형 물감과 키가 비슷해 뵈는 크레파스 같은 것들. 볼펜과 사인펜은 잉크가 불투명 펜대 안에 들어가 있어 얼마나 닳았나 가늠할 길조차 없어 보인다. 집안 곳곳을 나뒹구는 지우개는 손 닿는 대로 주워 통 하나에 모아두었다. 과연 이 많은 학용품을 다 쓸 날이 오기는 올까? 다 쓰기는커녕 아이가 자라나면서 자연스레 그 쓸모가 잊힐 테지.



넘쳐나는 아이의 문구를 보면서 '몽당연필 한 자루'를 떠올렸다. 연필 한 자루를 끝까지 써보는 일이야말로 아이가 어려서 꼭 한번 경험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연필 한 자루쯤이야. 약간의 인내심을 발휘한다면 그 쓸모의 끝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을 테지. 연필이야 쓰는 만큼 닳아갈 테고, 줄어가는 모습을 두 눈으로 볼 수 있으니, 그 소용을 실감하기에 연필만 한 도구가 또 어디 있리라고.




몽당연필 7.5cm, 5.5cm



아이 방 문구 수납함이 각종 필기구와 미술 도구로 빼곡하다. 속이 보이지 않는 튜브형 물감과 크기가 고만고만한 크레파스, 잉크가 불투명 펜대 안에 든 볼펜과 사인펜처럼 대개가 쓸모의 끝을 알 수 없는 문구들. 집안 곳곳을 나뒹구는 지우개는 손 닿는 대로 모아두기 바쁘다. 이 많은 학용품을 다 쓸 날이 오기나 할까? 아이가 자라남에 따라 그 쓸모도 절로 잊히고 말 테지.



넘쳐나는 문구 앞에서 한 자루의 ‘몽당연필’을 떠올렸다. 한 자루의 연필을 끝까지 써보는 경험. 이것이야말로 지금 아이에게 꼭 필요한 일일지 몰랐다. 연필 한 자루쯤이야. 약간의 인내심을 발휘한다면 어렵지 않게 그 쓸모의 끝을 볼 수 있을 터. 쓰는 만큼 닳아 가는 연필만큼 눈과 손으로 그 소용을 실감하기 좋은 도구가 또 있을까.



아이더러 가장 마음에 드는 연필 한 자루를 고르게 했다. 그러면서 그 연필이 다 닳도록 끝까지 써보자고 했다. 스스로 몽당연필을 경험케 하려는 심산이었다. 아이는 별 것 아닌 엄마의 제안을 흥미롭게 받아들였다.



아이의 작은 손에 들린 연필은 키가 한참이나 컸다. 몹시 무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웅크려 연필을 거머쥔 손은 연필 몸통의 한참 아래에 가 있고, 무게중심이 안 잡히는 연필은 자꾸만 기우뚱했다.



물론 시작은 놀이와도 같은 것이었다. 성취하면 상을 얻게 되는 작은 미션 수행과도 같은 것. 그러나 아이는 자신이 지목하여 잡은 연필에 마음을 두기 시작했다. 쓰고 그리는 일이 부쩍 늘었다. 연필로 하릴없이 선을 긋고, 모양을 그리고, 엄마, 아빠, 선생님, 심지어 관계가 뜸한 친구들에게도 부러 편지를 썼다. 한자를 쓰고 그리는 일에 빠진 것도 연필을 손에 쥐면서부터였다.



둘은 더없이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연필 한 자루가 닳아 빠지는 가운데 아이는 흑심이 풍기는 미더운 향을 맡고, 서걱대는 정다운 소리를 들으며, 손끝으로 전해오는 생생한 질감을 느꼈으리라. 연필은 아이 손에서 정직하게 닳아져 갔다. 키가 점점 줄어 자리몽땅해지더니 어느 날은 아이의 작은 손아귀에 쏙 숨어버렸다. 드디어 아이 손에서 몽당연필 한 자루가 탄생한 날이었다.




데굴데굴 또르르르...

몽당연필이 또 어디로 갔나. 오늘도 아이는 몽당연필과 숨바꼭질이다.

“일단 다른 연필로 쓰지 그래.”

“안 돼요. 꼭 그걸로 써야 하는데……”

아이가 울상이다. 좀 전까지만 해도 움켜쥐고 있던 몽당연필이 어딘가로 단단히 숨어 들어간 모양이었다. 쉽게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키 작은 친구 탓에 아이는 애간장이 탄다.



“엄마가 청소하면서 잘 볼게. 치우다 보면 나올 수……”

라고 말하는데 ‘아차’ 싶었다. 혹시 그건가? 식탁 위를 정리할 때 아이가 펼쳐둔 책을 급히 덮었는데, 그 속에 끼어 들어간 것이 분명했다. 펼쳐 놓은 책을 무작정 덮어 버리면 아이가 후에 애를 먹을까 싶어 곁에 놓인 연필을 북마크 삼아 끼워두었던 것이다.



“미안해, 엄마가 아까……”

라고 말하며 책을 확 펼쳤을 때, 그토록 찾아 헤맨 몽당연필이 또르르 굴러 떨어졌다.

“찾았다! 여깄었네!”

아이 눈에 눈물이 살짝 고였다 사라진다. 금세 함지박 막 한 웃음이 피어난다. 아이는 어렵사리 찾아낸 친구를 제 손아귀에 꼭 품는다. 다시는 헤어지지 않겠다고 다짐이라도 두듯이. 이 키 작은 친구도 아이를 무척 반기는 것만 같다. 두 손을 꼭 맞잡은 친구는 그때부터 떨어질 줄 모른다.




물건과 자극의 홍수 속에서 어쩌면 우리는 마음을 쏟을 단 하나의 대상을 갈구하는지 모른다. 하나의 물건이 제 쓰임을 다하도록 그 곁을 지키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무엇에든 진심을 다하는 법을 배운다. 작은 물건에 애착을 두어 본 각별한 경험, 이것이 네가 훗날 사람 사이에 맺게 될 숱한 관계로까지 번져가기를. 한번 맺은 연을 부디 소중히 할 줄 알기를. 차림이 수수한 상대라도 부디 그만이 품은 고유의 멋과 향을 알아챌 수 있기를. 상대의 허물을 마주하더라도 한번 맺은 연을 단박에 끊지 않고, 아름답게 갈무리할 줄 아는 네가 되기를.



몽당연필처럼 키가 작은 내 아이를 한없이 응원하고픈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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