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궁지에 몰리면 걷는다

我날로그

by 서지현


나는 궁지에 몰릴 때면 걷는다. 풀릴 길 없는 문제로 머릿속이 복잡할 때, 나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세상 일들이 나 자신보다 하릴없이 커 보일 때, 막 걸음을 떼는 아이처럼 작은 용기를 내어 발을 내딛는다.



한참을 걸었다. 땅을 딛고 서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느낀 날이었다. 속 시끄러운 일들로 며칠 골머리를 앓아 왔다. 이리저리 잔가지 같이 흩어진 상념들을 그러모아 군불을 지펴 본다. 어지러운 생각들은 불이 잘 붙지 않는다. 그것들이 이미 우울과 억울, 체념과 슬픔에 눅진해져 있는 탓일지 모른다. 매캐한 연기만이 잇따라 피어 올라 눈과 목이 따끔거린다.



마음의 갈피를 잡으려는 찰나, 작은 불씨 하나가 살아났다. 생각의 잔가지들이 마침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기 시작한다. 단번에 정리되지 않는, 몸집 큰 생각의 장작은 뚝뚝 분질러 가며 불 위에 얹는다. 축축이 젖은 장작개비들이 불꽃에 힘차게 맞선다. 맹렬한 불꽃과 매캐한 연기가 한데 섞여 너울댄다.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겠다 으르렁대기라도 하듯이. 이쯤 되니 눈시울이 붉어지고 마음까지 매워진다.



초겨울 알싸한 공기 중으로 허연 입김이 뿜어져 나와 눈앞이 자욱하다. 입을 벌려 숨을 쉬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무래도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보면 자주 입으로 숨을 내쉬게 된다. 입으로 숨을 쉬자면 들숨과 날숨이 불규칙해지면서 숨을 거칠게 몰아쉴 수밖에 없다. 나의 상태를 깨닫는 순간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가만히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코로 숨을 쉰다는 건 일정한 보폭의 걸음과도 같다. 일정한 깊이와 빠르기로 들고 나는 숨. 그렇게 숨의 리듬을 찾아가다 보니 흥분이 가라앉고 평정심이 찾아온다.



코로 내쉬는 숨에는 허연 입김 같은 차가운 것이 없다. 찬 공기가 콧속을 지나며 따스하게 덥혀진 때문이리라. 어디 그뿐이랴. 코는 공기 중에 든 오염물도 걸러 준다지. 쓸 생각이라도 콧속을 지나면 그리 될까? 못난 생각들을 실어 보낸 숨이 코를 통과해 폐부를 지나고 나면, 조금이나마 정화되고 단정한 상태가 되어 몸밖을 빠져나오게 되는 걸까? 모르긴 몰라도 코로 호흡을 유지하다 보니 그간 품어 왔던 미움과 분노, 우울과 상실의 크기는 작아지고, 의기소침해 쪼그라들었던 마음은 슬며시 새 기운으로 부푸는 것만 같다.




나는 힘써 미디엄 템포로 걷고 있다. 너무 빠른 걸음으로 걷다가 내면의 상처를 아주 모른 척할까 봐. 혹 너무 느린 걸음 탓에 실상은 별 것 아닌 문제에 아주 매몰돼 버릴까 봐. 외면하고 싶은 상황, 다신 꺼내 들고 싶지 않았던 생각이라도 용기를 내 마주해야 한다. 그래야 결국 툴툴 털어버릴 수 있다는 걸 안다. 일정한 호흡과 함께 보폭을 가다듬는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걸음에 적당한 긴장을 실어 보내면서.



얼마나 걸었을까. 탈 것들이 타고 난 가슴이 훈김으로 달아올라 있다. 패딩 조끼의 똑딱단추를 투두둑 끌러 앞섶을 풀어헤친다. 남방 소매를 두어 번 접어 돌돌 말아 올린다. 통기성이 좋은 운동화를 신고 나설 걸 그랬나. 발바닥이 후끈거리고 발이 덥다. 등줄기에 꼽꼽하게 베어난 땀이 기분을 살짝 들뜨게 한다. 불필요한 감정과 생각의 찌끼들이 몸속에서 솟아난 이 땀방울들과 함께 저 멀리 어딘가로 증발해 버릴 수만 있다면.





유순한 볕이었을망정 겨울철 해가 쑥 빠져 버린 거리가 서늘하다. 어둠이 삽시간에 깔린다. 세차케 후려치는 하늬바람 한 자락에 후끈 달아오른 몸을 식힌다. 상념의 장작이 거진 타고난 뒤 몸과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다. 가까운 벗을 마주하고 앉아 속내를 터 놓았다 한들 이보다 홀가분할 수 있까? 벗의 위로를 작은 위안 삼아 하루를 넘길지언정 얼마 안 가 여일한 상황을 마주해야 할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떠돌던 상념을 안으로 모으고 난 뒤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내면의 필터를 통과한 문제들이 조금 정돈된 느낌이다. 걷고 난 후 나 자신이 조금 더 단단해진 것 같기도 하다. 조물주는 어떤 상황에서라도 앞을 향하라고 사람을 두 발로 세워 두셨고, 사방을 살피고 하늘을 올려다보라고 너른 시야 또한 허락하신 것이리라.



어렴풋하게나마 나란 존재가 실감 난다. 여전히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나, 그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나를 만난다. 적어도 나는 땅을 딛고 든든히 서서 앞을 향할 수 있고, 더딜지언정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존재가 아니던가. 이 사실이야말로 걷기가 내게 건네는 최고의 위안이요, 격려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삶이 실감나지 않는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