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는 감각이다
여아라면 대개 한 번쯤 핑크와 사랑에 빠진다. 딸아이의 핑크홀릭은 네 살 언저리쯤 시작됐다. 헤어핀에서 옷, 양말, 액세서리에 이르기까지 제 몸을 온통 핑크빛으로 두른 아이는 무엇 하나 부러울 것 없는 궁전의 공주나 다름없었다.
그랬던 아이가 언제 그랬냐는 듯 핑크에 시큰둥해졌다. 그것은 핑크빛 자체에 대한 반감이라기보다는 특정 색을 여아의 빛깔로 취급하는 사회적 통념에 대한 거부로 보였다. 아이 안에 일종의 자의식이 자라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핑크를 떠난 아이에게 색의 선택지가 많아진 건 아니었다. 여전히 여아 옷 취급 매장은 핑크를 제하고 나면 노랑, 빨강, 보라 계열의 몇 안 되는 색상으로만 꽉 채워져 있었으니까. 더 이상 핑크를 원치 않는 아이에게 보라는 그럭저럭 괜찮은 대안이 되어 주었다.
10만 원이나 하는 큰돈을 들여 아이에게 입힐 보라색 원피스를 샀다. 어쩌다 사게 되었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구두 한 벌 해드릴 참으로 아이 할머니를 백화점에 모시고 갔다가 우연히 아동복 코너를 지나게 된 것. 눈앞 가판대 위 하얀 레이스가 목선을 빙 두른, 사랑스러움을 물씬 풍기는 골지 원피스를 보았다. 할머니도, 오빠도 ‘이 옷 참 예쁘다’라며 입을 모았고, 딸아이도 딱히 싫지 않은지 고개를 가만 끄덕였다. 비싼 가격이 마음에 쓰이면서도, ‘정 안 되겠다 싶으면 반품하러 오면 되지’하는 생각으로 덥석 값을 치르고 말았다.
색깔에 관련한 또 하나의 이야기다. 아이의 색연필 키트가 한동안 묵어 있었다. 아이가 좋아하는 몇 자루 색상만 닳아있을 뿐, 나머지 십여 자루의 색연필은 몸길이가 도통 줄어들 기미가 없었다. ‘그림에 흥미를 잃은 걸까?’ 원체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아이라 조금 의아했고 서운한 마음마저 들었다. 그러면서도 ‘어쨌거나 아이가 저걸 다 쓰면 새 걸 내줘야지’하고 벼르고만 있었다. 색연필을 단순히 생활 물자 취급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딸아이가 베란다 창고에서 우연히 새 색연필 키트를 발견했다. 색연필을 쭉 훑어보던 아이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엄마, 이걸 왜 여태 안 꺼내 줬는데!”
소리치는 아이의 시선이 어느 한 지점에 정확히 꽂혀 있었다. 민트 빛깔 색연필이었다. 아이는 곧 그것을 손에 단단히 거머쥐고 하얀 도화지 앞에 앉았다. 민트 망사 날개를 단 천사와 민트 체크무늬로 된 짧은 치마를 해 입은 소녀들. 난 무엇에 홀린 듯 아이의 손끝에서 술술 뽑아져 나오는 캐릭터에 빠져 들었다. ‘이 아이가 품은 세상이 이토록 밝고 화사했던가?’ 민트 색연필은 아이가 자신을 맘껏 드러내는 최고의 도구로써 제 값을 톡톡히 치르고 있었다.
제 방에서 학교 갈 준비를 마친 아이가 앞을 스윽 스치고 지나가는데 뭔지 모를 싱그러운 기운이 밀려왔다. 민트 머리띠에 민트 티셔츠. 손목에는 색종이로 손수 접은 민트 하트 팔찌가 요염하게 둘려 있고, 민트 문양이 새겨진 발목 양말이 야물게 올려 있다. 하얀 가르마를 가운데 두고 민트 머리끈으로 묶은 양갈래 머리가 곱고 단정하다. 아뿔싸! 좀 전에 아이가, ‘엄마, 오늘은 삐삐 머리로요’ 하며 내밀던 머리끈마저 민트였구나. 물건의 빛깔이나 맵시를 칭하는 말, 깔. 아이는 제 주변에 흩어져 존재하는 모든 민트를 끌어다가 부지런히 깔을 맞추는 중이었구나.
온통 민트로 채색한 아이는 어찌나 당당하고 향기로운지, 민트 띠가 둘린 머리칼을 가만 쓸기만 해도 청량한 향이 손끝에 묻어날 것만 같다. 민트 티셔츠에 폭 파묻힌 이 작은 아이를 가볍게 끌어안고 싶어 진다. 상큼하고 화한 향이 온몸에 배어들고 말테지. 콩콩 가뿐하게 내딛는 걸음 아래로는 싱그러운 허브 싹이 돋아날 것만 같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슬쩍 뒤를 돌며 인사하는 아이. 입꼬리가 올라간 표정마저 ‘민트~’하는 것 같다. 그것도 잠시, 아이는 그 부드러운 양갈래 머리를 살랑거리며 미끄러지듯 현관을 빠져나간다. 풍성하게 잎을 피워 올린 허브가 바람결에 우르르 흔들리는 것 마냥 청량한 기운이 날린다. 화한 기운이 휘감아 돈다. 정신이 혼미하다. 아, 아찔하다.
문득 가슴 한편이 시리다. 여태 난 스스로가 어떤 빛깔의 사람인지 모르고 살아왔다. 취향과 선호를 드러내는 일에 유독 서툰 삶이었다. 자기주장을 펼 줄도 몰랐다. 무채색 사고와 태도에 길들여져 남들이 사는 방식에 적당히 묻어 지내왔다.
문득 내 아이에게 많은 샘이 났다. 나는 조금 더 분명해질 순 없는 걸까? 이제라도 내게 어울리는 빛깔을 찾아낼 수 있을까? 나만의 기호와 취향을 알아가고, 내게 어울리는 사람을 찾아 연을 맺으며, 꿈꾸는 삶을 구체적으로 꾸려나갈 수 있을까? 하얀 도화지와 태블릿 위에서 과감히 색채를 다루는 여느 예술가의 손놀림을 떠올려 본다. 워너비가 어디 먼 데 가 있지 않다. 누구보다 소신과 취향이 분명하고, 자기표현에 망설임 없는 꼬마 예술가가 우리 집에 산다.
다시 원피스 이야기다. 비싼 값을 치르고 내온 보라 원피스는 여직 잘 있다. 아이방 옷걸이에 멀쩡하게 걸려 있다는 뜻이다. 언젠가 잘 입을 거라 기대하면서 반품의 시기마저 놓쳐 버린 탓이다. 아이는 한 번씩 선심 쓰듯 말한다. “오늘은 보라색 원피스 한번 입어 줄게.”
아이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일이 이토록 쉽고도 어려운 일이었던가. 아이의 속내를 더 깊이 들여다보자고, 그의 취향과 관심을 존중하자고, 단정하게 걸린 원피스 앞에서 오늘도 다짐을 둔다. 취향저격. 아이를 키우는 이라면 한번쯤 기억해야 할 대원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