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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지현 Jan 05. 2022

담뱃재와 커피 찌끼

아날로그는 냄새다


          

커피 찌꺼기를 잘 말리고, 종이필터에 그대로 포장해 방향제로 쓴다


고슬고슬 잘 마른 커피 찌끼에서 담뱃재 냄새가 풍겼다. 며칠 전 집에서 커피를 내리고 나서 쟁반에 펼쳐 말린 고운 커피 가루다. 시트러스(citrus) 향이 빠져나간 황갈색 잔재물엔 씁쓸한  탄내만 남았다. 기억 속 냄새의 근원을 따라 고운 커피 찌끼를 쓸어 본다. 그리고 거기서 아버지를 보았다. 하염없는 생각에 잠겨 담배를 이어 태우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고3 수험생 시절, 인 서울(서울권 대학 진학)을 이뤄 집구석을 탈출하자고 마음먹었다. 집안 공기를 장악하곤 했던 담배 냄새의 역겨움이 이유의 팔 할이었다. 아버지는 매일같이 주방 환기구 아래 등을 구푸리고 앉아 담배를 태웠다. 환풍구로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고얀 연기는 집 안 곳곳을 누볐다. 그러고도 출구를 찾지 못해 낙오된 것들은 신성한 여고생의 방 문틈을 버젓이 비집었다. 난데없는 불청객의 침입에 난 속수무책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미웠다. ‘딸이 공부 좀 하겠다는데, 도움은 못 줄망정 고약한 담배 연기나 풍기는 부모라니...’ 불만 가득한 마음에 수시로 툴툴댔다. 그러면서도 ‘담배 좀 나가서 피우시라’는 말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니 아빠가 얼마나 스트레스에 시달리는지 새벽에도 잠 못 자고 나와 담배를 태우더라’ 하는 말을 엄마로부터 심심찮게 들어온 터였다. 아버지는 금융권 회사에 근속하며 많은 일로 골머리를 앓았다. 어쩌면 그는 담배 한 개비를 숨구멍 삼아 가까스로 삶을 이어가는 중이었는지 몰랐다. 그러나 담배란 슬프게도 부녀 사이에 양립할 성질의 것이 결코 못됐다. 아버지가 그것의 힘을 빌어 호기롭게 숨을 내쉬자면, 딸은 꼭 그만큼 숨을 틀어막아야 했으니까. 



아버지의 한숨이 빨갛게 타고난 자리엔 까만 재가 남았다. 그러나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힘없이 떨궈진 담뱃재와 꽁초는 여전히 독한 기운을 뿜어댔다. 재떨이 옆을 스치는 일조차 곤혹스러웠다. 니코틴이란 타도, 타도, 다 타지 않을 존재였다. 내 아버지의 가슴에도 꺼지지 않는 한숨이, 끝끝내 타지 않을 어떤 독한 기운이 남아 있었던 걸까? 




어쩐지 오늘은 그런 아버지를 모른 척 지날 수가 없다. 그의 둥글게 말린 등을 오래도록 바라본다. 왜 나는 이토록 힘없는 아버지를 미워하면서 그에게서 멀리 도망치려고만 했던 걸까. 어찌 난 ‘무슨 속상한 일이라도 있으시냐’, 아버지께 다정한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 무뚝뚝한 딸이기만 했을까. 



하릴없이 커피 찌끼를 쓸어 본다. 지금 아버지가 담배를 태우신다면 그가 떨군 담뱃재에서는 어떤 냄새가 날까? 오래도록 뵙지 못한 아버지가 몹시 생각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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