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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지현 Dec 31. 2021

딱따구리를 들었다

아날로그는 소리다

따구리와 인연을 맺은 건 우리 가족이 관악산 자락에 삶의 둥지를 틀면서부터다. 당시 세든 집은 서울에서 지대 높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높은 곳에 위치한 빌라였다. 건물은 깎아지른 언덕에 자리했고, 집 뒤편으로는 산으로 바로 통하는 길이 나 있었다. 아이들과는 주로 뒷산에 올라 흙을 밟으며 놀았다. 야산이 집 뒤뜰인 양 수시로 드나들며 사계를 누리는 일상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산속에 폭 파묻혀 지낸 것만은 아니다. 아이가 놀이터를 원하는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은 아침부터 마음의 채비를 단단히 했다. 한 손으로는 네 살 아들의 손을 잡고, 품에는 두 살 어린 딸을 안은 채 살얼음판 같은 경사길을 내려가야 했기 때문이다.



대지에 아까시 향이 가득하고, 완연한 봄기운이 밖으로 나가자고 채근하는 오월의 어느 날.

"엄마, 빨리 가자. 긴 미끄럼틀 탈래."

그날따라 아이도 맘이 동했는지 저 먼저 현관에 나가 신발을 주워 신고 있었다.

"어, 근데 좀 기다려 줘. 동생 기저귀랑 우리 간식도 좀 챙겨야지."

날도 좋고 한번 집 밖을 나서기가 쉽지 않으니 한나절 공원에서 시간을 보내고 오자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아이가 발을 동동 구르는 통에 마음만은 급했다. 그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손에 집히는 대로 필요한 것들을 챙겨 가까스로 집을 빠져나왔다. 두 아이를 대동한 것만으로도 모자라 한 짐 이상의 짐을 지고 어렵사리 하산길에 들어섰다.





두 무릎을 휘청거리며 어렵사리 당도한 아랫동네 놀이터. 짐을 풀고 겨우 숨을 돌리자면 어김없이 딱따구리가 울었다.


'딱따라라라라락'

'또르르르르륵'


뛰놀던 아이가 멈칫했다. 또랑또랑 천지를 울리는 강하고 급한 소리에 전율하면서. 아이는 눈에 안 보이는 존재의 작은 포효에 겁을 집어먹었다. 그 큰 눈망울에 두려움을 가득 품고서 엄마 손을 강하게 잡아끌었다. 우리는 그 길로 황급히 발길을 재촉해야 했다. 열두 시를 알리는 괘종시계의 울림에 신발마저 떨군 채 자리를 뜬 한 공주처럼, 총성을 뒤로하고 막 피난길에 오른 어느 다급한 이의 마음으로. 애초 엄마가 품은 야무진 계획은 뜬금없는 소리 한방에 무산되고 말았다. 그날도 그렇게 딱따구리가 울었다.



언덕을 오르는 일은 한 차원의 난도가 더해진, 그 자체로 고난의 행군이었다. 어디 한 군데 두둑한 살점 한 점 안 붙은 가는 몸에 두 아이의 무게를 고스란히 짊어지고, 단순 떼만으로 보기 어려운 아이의 투정도 함께 받아 내야 했으니 말이다. 군에서 그토록 악명 높다는 유격 훈련이라면 이에 비할 바가 될까? 아이를 이고 지고 살인적인 경사지를 오를 때마다 그런 물음표가 떠올랐다.


    

그 와중에 한낱 새소리에 잔뜩 겁을 집어먹은 아이의 모습에 웃음이 났다. 이 고달픈 순간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대략 난감했다. 여러 모로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이러니하게 아이의 등을 밀어준 것도 딱따구리였다. 아이가 힘들다며 바닥에 주저앉을라치면 딱따구리가 또 한 번 나무를 쪼아댔고, 아이는 다시 느낀 공포에 벌떡 일어나 걸음을 뗐다. 우리는 그렇게 울고 웃기를 반복하며 바득바득 언덕을 기어올랐다. 모든 게 딱따구리 탓이기도, 그 덕이기도 했다.  




딱따구리는 소리로 아는 새다. 까치나 참새처럼 일부러 날아와 제 모습을 보이는 경우란 없고 다만 제 위치에서 소리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또로로로로로', 혹은 '타라라라라락' 하는 소리가 들리면 어딘가 멀지 않은 곳에서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고 있다고 짐작할 뿐이다.



딱따구리 소리는 경이롭다. 그 소리는 '난다' 라기보다는 '발사된다'는 편이 어울린다. 새가 나무를 쪼는 소리는 마치 단단한 철 방아쇠가 뒤로 힘껏 당겨졌다가 급하게 놓이면서 강한 탄성으로 부르르 떠는 소리 같다. 소리 끝에는 반드시 깊고도 큰 산울림이 인다.



굳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도 제 몫을 감당하는 것으로 타인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인생이 있다. 꼭 딱따구리 같은 인생이다. 제 한 몸 사리지 않고 나무를 쪼아 벌레를 잡고, 구애를 하고, 둥지를 틀고, 또 새끼를 먹이는 당찬 새. 그는 하루면 무려 2천여 마리의 벌레를 잡아먹는 것으로 숲을 살린다. 그가 나무에 뚫어 놓은 구멍들은 다른 새들의 둥지가 된다. 그저 제 삶에 충실하기 위해, 꿋꿋이 나무를 쪼은  행위가 어떤 식으로든 생태계에 이로움이 되고 마는 것이다. 



딱따구리가 살려내는 게 비단 숲 생태계뿐일까? 주어진 생을 씩씩하고 살아내는 딱따구리의 소리 앞에서 내 작은 삶을 돌아보게 된다. '미물이라도 되는대로 살아가는 생명체란 없구나', 하는 생각에 미치며 겸허해진다. 삶의 길을 잘못 들어섰을 때 발길을 돌이키게 하는 것은 어느 권위자의 훈계나 다그침이 아니다. 있어야 할 자리에서 묵묵히 제 몫을 감당하는 자연의 작은 존재들이다. 




꼭대기 집에서 지대가 완만한 곳으로 이사했지만, 관악산 자락을 아주 뜨진 못했다. 첫째는 초등학생이 되면서 동네 친구들과 집 앞 공원에 모여 놀 때가 많다. 하루는 아이들이 공원에 딸린 모래놀이터 한 구석에 깊은 구덩이를 팠다. 그리고 공원 근처 산자락에서 그러모은 나무 기둥과 가지를 얼기설기 엮어 미니 움막을 지었다.



자세히 보니 가장 굵은, 축 노릇을 하는 재목에 꼭 단춧구멍 크기만 한 구멍이 송송 뚫려 있었다. 아이들은 딱따구리가 쪼아 놓은 흔적이 틀림없을 거라 했다. 아이들은 구멍을 가만두고 보지 못하고 공원에서 꽃을 주워 와 그 틈을 메꾸며 놀았다. 마치 새로 입주한 집에 못 자국이 있으면 액자나 그림, 그 무엇이라도 걸어야 직성이 풀리는 어른들처럼. 신비의 대상이기만 했던 딱따구리가 언제 이렇게 친근한 대상이 되어 아이 곁에 와 있는지 의아했다.



나무로 집을 짓던 아이가 내게 슬며시 다가오더니 나직이 속삭였다.

"엄마, 딱따구리가 울어요."

"무슨? 아무 소리도 안 나는데?"

아이는 제 배를 가리키며 싱긋 웃는다.

"바로 여기서요. 딱따구리가 배가 고프다고 쿄교고고고고 우네요."

아이의 재치에 웃음이 났다. 밥때가 지난 제 뱃속이 연신 꾸르륵 대는 모양이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맨날 산 근처 맨발(맨발공원)에서 놀다 보니 딱따구리가 뱃속에 들어와 살게 됐다고.



우리 아이 뱃속에 똬리를 튼 딱따구리는 시도 때도 없이 운다. 밥 내놓으라는, 간식도 내놓으라는 딱따구리 성화에 꼼짝없다.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로 아슴푸레 존재를 가늠했던, 신비롭고 경외롭기까지 했던 새가 우리 삶 가까이 와 있다. 이제나 저제나 먹성 좋은 딱따구리가 운다. 그것은 여전히 나의 생의 감각을 흔들어 깨우는 소리다. 고단함을 떨구고, 삶을 힘써 살아내라고 재촉하는 성화나 다름없다.


그리하여 나는 오늘도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가늘게 떨며 진동하는 풀벌레 소리에도 귀를 기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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