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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지현 Jul 15. 2023

우리의 고구마순

어른이 되어 가는 아이

살면서 겪어보지 못한 수위로 기관지염을 앓은 지 꼬박 한 달, 이제 겨우 살만하다 싶은 날 '제발 그런 일만은' 했던 그 일이 눈앞에 떡하니 벌어지고 말았다. 한 번씩 기침을 뱉어내던 아들이 밤새 열이 오르더니 영락없이 나의 양상으로 앓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의 성향이란 그가 아플 때 확연히 드러나는 법인가 보다. 약을 먹었으면 이불 한 장 푹 뒤집어쓰고 깊은 잠이나 청할 것을, 녀석은 도통 혼자 앓을 생각은 않고 자꾸 엄마인 나를 불러들여 '이마에 손을 얹어 봐라', '종아리 좀 주물러 달라', '옆에 있어 주면 안 되느냐' 하며 당최 날 가만 두질 않는 것이었다.



오냐오냐, 오래간만에 어린양이나 실컷 부려 봐라. 나는 못 이기는 척 다리도 주물러 주고, 발바닥도 꾹꾹 눌러주고, 그러다 졸리면 옆에 누워 한잠 더불어 자기도 하면서 녀석의 곁을 지켰다. 그렇게 반나절을 뒹굴다 보니 무료하다 못해 무기력해져 뭐라도 생산적인 일을 해야 겠단 생각에 이르렀다. 결국 고구마순을 한 더미 내와 일을 벌이고야 말왔다.



한참을 아들 곁에 쭈그리고 앉아 고구마순 껍질을 벗기는데, 누워 있던 녀석이 슬그머니 다가와 손을 보탠다.


"아들은 힘든데 누워 있지 그래."

"나도 이게 재미있어서."

"엄마 힘든 줄 알고 도와주려는 건 아니고?"

"그런 것도 있고."

"그나저나 아들 솜씨가 이젠 수준급이네."

"내가 이래 봬도 엄마랑 해마다 이걸 해왔잖아."

"이걸로 된장국 끓일까?"

"당연하지. 내가 고구마순 얼마나 좋아하는데."


길쭉길쭉 통통하게 살이 오른 고구마순을 뚝뚝 분질러가며 우리는  그래왔듯 일상의 말들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그런데 참 희안하기도 하지, 메마르고 건조한 가슴에 연애 때보다 더 찐득하고 달콤한 무언가가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아이와 나는 지난 여름에도 고구마순을 함께 다듬었었다. 그리고 한 해를 더 지낸 오늘의 아이는 어딘지 모르게 달라져 있었다.




이맘때가 되면 동네 할매들은 어김없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고구마순을 다듬는다. 혼자 일을 벌이기엔 엄두가 나지 않는, 다소 막막한 마음 탓일 게다. 그만큼 고구마순 손질은 여타 다른 나물에 비하면 난이도 상에 해당하는 일감이다. 줄기 하나의 껍질을 말끔히 벗겨내는 데만도 여러 번 손이 가는 데다  손톱 밑과 손가락 일부가 까매지는 원치 않는 훈장을 거부도리가 없다.



이 모든 상황을 아는 아들이, 제 말대로 이 일이 마냥 좋아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어려서야 놀이 삼아 호기심 삼아 겁없이 덤벼들었다지만, 이 만만찮은 일을 그것도 오늘같이 시원찮은 몸을 일으켜 선뜻 나설 일인가. 더 이상 재미 삼아서가 아닌, 집안일에 대한 의무감을 작게나마 느끼기 시작한 아이. 네가 어느새 이렇게 훌쩍 커버렸구나. 대견한 마음이 드는 한편, 나는 묘하게 울적해지고 말았다.



앓느라 지친 아들이 곤히 잠든 밤, 펄펄 끓는 물에 잠시 몸을 담그고 나온 고구마순의 투명한 자태가 이루 말할 수 없이 곱다. 사심 없이 맑기만 한 연둣빛 고운 빛깔이 꼭 네 마음 같구나.



당장 내일 아침 된장 두어 숟갈 풀어 발발 국을 끓여 내주면 아들은 '어우, 시원타' 하면서 연하고 순한 고구마순을 아작아작 씹을 것이다. 마치 다 자란 어른이 뱃속을 해장하듯 그렇게 시원스럽고 게걸스럽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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