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지현 Apr 16. 2024

부부, 각자의 역할을 찾아

두 개의 톱니바퀴가 되어

연수 확정과 함께 남편은 이미 저만치 앞질러 나가 있다. 중개인의 도움 없이 비자를 발급받아 보겠노라 두 팔을 걷어부쳤고, 미국에서 살 집과 아이들 다닐 학교를 알아보느라 밤낮 눈알이 벌겋다. 그는 미국에서 시작할 삶이 매끄럽게 세팅되고 나면 이곳 삶이야 자연히 정리될 는 것 같다.



나는 조금 다른 입장이다. 아무래도 이곳 살림이 원만히 정리된 후라야 눈앞 도전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만 같다. 중고거래 사이트를 들락거리다 보면 '갑작스러운 이민으로', '눈물을 머금고'란 문구를 단 헐값 매물들이 심심찮게 올라오는데, 그건 아무래도 날름 주워가는 사람만 봉을 잡는, 누가 보더라도 불균형한 상황이다. 얼마간의 여유를 가지고 찬찬히 살림을 처분할 수 있다는 걸 다행스럽다 해야 할까? 오랜 세월 애지중지 가꿔 온 살림을 내다 버리다시피 해야 할 처지라면, 그게 바로 나라면 적지 않은 상실감에 사로잡힐 테니까.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남편은 새 삶의 개척자 노릇을, 나는 이곳 생활을 매듭짓는 일을 시작했다. 이렇다 할 의논은 없었지만 우리 부부는 각자가 중시 여기는 일을 찾아 알아서 움직였다. 부부의 서로 다른 역할은 두 톱니바퀴 같았다. 가끔 삐걱대지만, 그러나 대개는 하나가 다른 하나를 지지하며 바퀴는 숨 가쁘게 굴러가는 중이다. 두 개의 바퀴가 착오 없이 돌다 보면 언젠가 그날이 오리라 본다. 새 땅에 유연하게 안착하여 비로소 새 삶을 시작하게 될 날이.





살림 갈무리에 앞서 집안 정비가 필요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집안 곳곳 사소하게 헐고 고장 난 부분을 손보는 일이었다. 당장이라도 새 입주자가 들어와 사는 데 큰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기본 구색을 맞춰 놓는 게 집주인이 해야 할 최소한의 도리일 테니까.  



질근질근 물이 새는 주방 수전을 수리했다. 자꾸만 헛바퀴가 도는 세탁실 수도꼭지도 새 걸로 교체했다. 변기 몸체에 백색 시멘트를 덧발라 덜컹거리는 변기 문제를 해결했다. 삶에 큰 지장은 없지만 지속적으로 불편을 초래해 온 자잘한 문제들. 집을 내놓지 않았더라면 언제까지고 팔짱만 끼고 게으름을 피웠을지 모를 일들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욕실 세면대를 설치했다. 기존의 낡은 세면대를 떼어낸 후로 무려 3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음을 깨달았다. 그날은 한창 집안 물건을 비워내던 시기였다. 세면대를 없애던 날, '이 또한 미니멀이야' 하며 의미부여를 했더니, 글쎄 우리 집 착한 식구들은 그게 또 그런 줄로 알고 꾸역꾸역 생활의 불편에 적응을 하더라니.



그러고 보면 얼마 전 부분 도배를 마친 건 참 잘한 일이었다. 윗집 화장실을 타고 아들방과 그에 연이은 거실 벽면이 물로 흥건해진 일이 있었다. 그땐 아파트 노후가 초래한 불상사에 우리 집이 덜컥 걸려든 것만 같아 무척 성가신 마음이 들었었다. 그러나 따져 보면 잘 된 일이다. 새 벽지를 바른 덕에 실내가 깔끔해졌고 미국에 가 있는 동안 발생할 법한 사고를 미연에 방지한 셈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새 집이 말끔해졌다. 작은 불편을 해소한 것만으로 삶의 질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높아졌다. 집안에 머무는 시간이 이처럼 즐거울 수 있다니, 세입자에게 집을 내주고 안 주고를 떠나 진작 손보아 살 일이었다.



집을 정비하는 사이 남편은 미국 집 계약을 코앞에 두고 있다. 여행자 보험도 들었다고 한다. 여러 대조군을 두고 고민한 끝에 원만해 뵈는 한 곳을 골랐다고. 비자는 보험사에서 대행해 주기로 했다 하니 큰 짐을 덜었다. 남편이 워낙 빠른 사람인 건 인정하지만, 기존 살림을 정리하는 일이 새판을 까는 일보다 워낙 에너지와 노력이 많이 든다고 본다. 어떤 사소한 물건이라도 사기는 쉽지만, 처분이 배나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문득 매일 마주하던 집안 풍경이 새롭다. 아일랜드 식탁 위를 비추는 할로겐 등이 이렇게나 다정하고 따스했던가. 묵직하게 자리를 지켜며 생활에 안정감을 준 가구들이 오랜 친구처럼 듬직하다. 베란다 창밖 새하얀 벚꽃이 자못 흐드러졌다. 맞아, 정동향에 앉은 집이라 이곳은 봄이 오면서부터 참 살기 좋은 곳이었는데.



못내 아쉬운 마음을 품고 우리는 의연히 오늘의 톱니바퀴를 돌린다.  


 

이전 02화 집은 우리의 베이스캠프니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