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리어 세 변(길이+ 너비+ 높이)의 합 158cm(62inch) 이하, 무게 23kg(50파운드) 이내. 이것은 대한항공이 자사 홈페이지에 제시하고 있는 위탁수하물의 기준이다. 한 사람당 두 개의 수하물을 무료로 맡길 수 있고, 그보다 작은 사이즈의 캐리어 하나가 기내 반입된다.
문제는 미국 국내선의 기준이 이와 다르다는 점이다. 우리는 목적지인 NC주에 가기 위해 텍사스 주 댈러스 공항을 경유하기로 되어 있는데, 미국 국내선의 경우 단 한 개의 수하물에 대해서도 적지 않은 요금을 부과한다. 결론은 짐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우리 네 식구는 위탁수하물과 기내용 캐리어를 각각 한 개씩만 들기로 했다. 해운 택배는 시일이 오래 걸리고 비용 부담도 커서 일단 보류키로.
우리 운명공동체에 부과된 과제는 명확했다. 허용된 캐리어 용량만큼의 짐만 남기고 생활의 모든 짐을 처분할 것. 이곳에 천년만년 머물 것처럼 한껏 살림을 벌여놓고 살아온 내게는 매정하고도 에누리 없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크고 작은 캐리어 8개에 욱여넣을 수 있는 생활의 짐이란 과연 얼마나 되는 걸까. 또렷한 감이 오진 않지만 서바이벌 류일 거라 생각했다. 나름의 기준에 따라 추리고 추려 삶에 긴요한 물건들만 남기는 살림 서바이벌.
부피가 큰 짐을 줄이는 게 우선이었다. 식구별로 두세 개나 되는 겨울 외투를 하나씩만 남기기로 했다. 봄볕이 비껴가고 더위가 시동을 거는 이때 누가 겨울옷을 살까 싶었으나 언제 어디라도 살림꾼은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세탁을 마친 옷들마다 '역시즌'이란 문구를 달고 값을 후려치자 옷마다 임자가 나타냈다. 잘 두었다가 올 겨울에 입겠다는 사람, 조만간 추운 나라로 떠나게 되었다며 솜은 빠방하냐고 묻는 사람, 사연은 다양했다. 게 중에는 아이들 방한 용품을 나눔 받으러 왔다가 머쓱한 마음에 다른 옷가지를 사가는 분도 있었다.
이불은 계절별로 한 개씩만 남겨 압축하기로 했다. 매일밤 우리 가족의 포근한 잠을 보장하던 애착 이불을 차마 버려두고 갈 수 없어서였다. 베개까지 싸가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제 몸에 맞는 베개란 숙면에 상당히 중요한 요소라 외박을 할 때 챙겨 다니는 사람이 많던데. 그러나 차마 거기까진 욕심을 부릴 수없어 그만두었다.
신발장도 더불어 가벼워지는 중이다. 말끔하지만 더 이상 맞지 않게 된 아이들 신발이나 여벌의 신발들을 하나하나 처분해 나가고 있다. 일일이 손세탁을 하고 물건에 설명을 달아 신발마다 새 주인을 찾아내는 일은 만만찮은 작업이지만 그럼에도 점차 헐렁해지는 신발장 공간을 마주하자면 마음에 여유가 깃든다. 날개옷을 찾아 입고 하늘나라로 훌쩍 떴다는 여느 선녀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직 이곳에 대한 미련이 짙기만 한데, 과연 남은 신발 한 켤레 꿰어 차고 나면 주저 없이 이곳을 뜰 마음이 생겨날까.
남편에게는 만화책 전집 처분을 요청했다.
"아빠 이제 슬램덩크 팔 거야."
하는 소리가 떨어지기 무섭게 아들은 손때 묻은 만화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그토록 아끼던 만화를 떠나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서운했던지 아들은 한동안 만화에 빠져지냈다. 충분한 시간 속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이별을 맞이하는 꽤 바람직한 일이지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가 당근마켓에 내놓은 슬램덩크 프리미엄판을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멀리서 차 없이 찾아와서는 그 무거운 전집을 택시에 싣고 갔다. 택배 거래를 요청했다면 택시비보다 훨씬 덜 나왔을 텐데. 당장 실물을 영접하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면 무언가. 분명 그는 슬램덩크 덕후이리라.
아이들이 어려서 읽던 자연관찰, 철학동화, 전래동화 전집은 결국 나눔으로 처분했다. 어린이 중고서적은 원체 제값을 받기 어려운 데다 판매에 상당한 품이 드는 것이 현실이다. 매달 받아보던 정기간행물 <개똥이네 집>도 헐값에 넘기느니 차라리 어린아이를 둔 지인에게 주는 게 좋겠다 싶어 선물 삼아 보냈다.
그밖에 소설과 수필류는 온라인서점 YES24에서 바이백을 시도했다. 아무리 신간이라도 정가의 1/4 이상을 받기 어렵지만 손쉽게 다량의 책을 처분할 수 있다는 점이 유용했다. 당장은 '매입불가'로 뜨는 책이라 하더라도 카트에 담아두고 시시로 확인하다 보면 서점 재고 상황에 따라 바이백이 가능해지기도 하니 여유를 가지고 볼 일이다.
다만 살림, 요리 서적만은 단 한권도 떠나보내지 못하고 있다. 여태 우리 집 살림 여정에 함께 해 온 오랜 지기 같은 존재들. 계절이 바뀌거나 밥상이 문득 고민스러운 날엔 어김없이 어떤 책의 한 페이지를 펼치게 된다. 그래, 어차피 이 집을 뜨는 그날까지 집안을 돌보고 밥 지어먹는 일만은 멈출 수 없으니 끝까지 함께 가보는 거야.
아참, 꿋꿋이 책장을 지키고 있는 또 한 부류의 책. 두 아이의 애장 도서로, 백 권이 훌쩍 넘는 <살아남기 시리즈>가 이름값을 한다. 최후의 미션 수행자처럼 책장 한편에 꼿꼿이 선 자세로 여태 '살아남아' 있는 것이다. 아이들의 마음의 결단이 서는 날이야말로 <살아남기 시리즈>가 운명을 달리 하는 날이 되겠지.
옷가지와 책짐을 드러냈다고 해서 집안에 큰 여백이 생긴 건 아니다. 살랑이는 봄바람이 가까스로 드나들 정도의 가느다란 바람길을 겨우 튼 수준이다. 그럼에도 겨우내 걸치고 있던 무겁고 답답한 외투를 벗어낸 것마냥 마음만은 한결 가볍고 홀가분하다.
비워내되 잘 비워내고 싶다. 생활의 잉여와 군더더기가 걷히고 나면 삶의 우선순위와 유일무이 가치가 고스란히 드러나게 되겠지. 무엇이 끝까지 살아남아 저 캐리어 안에 실리게 될지 문득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