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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지현 May 07. 2024

당근 온도 99˚C 소회

내 생애 가장 큰 중고거래는

당근마켓 매너온도가 99˚C를 찍었다. 매너온도는 당근 앱 사용자로부터 받은 칭찬, 후기, 매너평가, 운영자 제재 등을 종합 평가해 만든 매너 지표로 흔히 '당근온도'라 불린다. 사람의 평균 체온을 암시하는 온도 36.5˚C를 시작점으로 해서 거래나 나눔 후기에서 좋은 평가를 받을수록 온도가 올라간다.



1년 전 통계에 따르면 매너온도 99˚C 사용자는 당근 앱 전체 이용자의 상위 0.03% 에 불과했다(당근마켓 "'매너온도 99도' 1만 명... 강남, 송파, 분당에 많아"/한국경제, 2023.01.18). 중고 거래의 초고수가 되는 길이 결코 쉽지 않음을 시사한다.





나는 당근마켓이 없던 시절부터 중고거래가 몸에 익은 사람이었다. 신혼살림을 다가구주택 10여 평 반지하에서 시작한 탓에 새 살림이니 혼수니 하는 말 자체가 어색하게 들렸다. 가구에서부터 필수 가전, 생활에 소용되는 거의 모든 물건을 중고로 였다. 그 편이 규모에 맞고 속도 편했다.



반지하를 탈출해 자가를 마련하고 나서도 모든 살림을 새 걸로 들여야 한다는 생각은 없었다. 이미 중고 세계의 참맛을 알아버린 터였다. 연식에 따른 성능 저하를 고려해 가전만은 새 걸 샀고, 아이들 책걸상을 제외한 모든 가구를 기회 닿는 대로 주워오거나 중고로 들였다. 그렇게 꾸준한 거래와 함께 매너 온도도 함께 올랐다. 





이전에 없이 중고거래가 가속화된 건 해외장기연수를 본격적으로 준비하고부터다. 중고거래의 뿌듯함을 다룬 4월 3일 자 브런치스토리 글 <나도 모르게 지구를 위하는 살림>을 쓸 당시의 매너 온도는 74.8˚C. 글을 쓴 지 불과 한 달 만에 매너 온도 최고점인 99˚C을 찍게 된 데에는 1년 해외살이를 목전에 둔 긴박함의 이유가 컸다.



매너온도가 높다는 것은 좋은 후기를 받은 동시에 그만큼 거래량이 많다는 뜻이다. 긴 여정을 앞두고 보니 집에는 유독 잉여의 물건이 많았다. 와인오프너, 카드 지갑, 디퓨저, 남성화장품, 밀폐 용기, 주방조리도구 세트, 손흥민 후드와 응원도구 등. '언젠가는 쓰겠지' 고이 모셔둔 미개봉 물품이었다. 시세보다 다소 낮게 책정한 금액에 앞다투어 팔려나가는 걸 보니 언제 팔아도 팔려나갈 물건들이었다.  



성급한 소비를 반성케 한 물건들도 꽤 됐다. 빔프로젝터는 가까스로 전원을 두 번 켰는데, 그도 그럴 것이 빔을 쏠 수 있는 거실 벽면과 맞은편 벽 사이 거리는 겨우 3m. 눈이 피로한데다 운신할 수 없는 공간에 질려 그 누구도 더는 홈씨어터를 말하지 않게 됐다. 집에서 출력할 일이 많을 거라며 호기롭게 구입한 복합기는 잉크 마른 지 오래다. 그래도 멀쩡한 제품을 헐값에 내놓는 게 아까워 결국 경로당에 기증하다시피 했다. 절판된 뒤로 몸값이 뛸 거라 장담하고 들인 법정 에세이물은 온라인 중고서점에 매입조차 안 되는 형편에 처해 있고. (섣부른 판단으로 뒷감당을 톡톡히 치러낸 이 모든 소비는 나의 소행이 아님을 이 자리를 빌어 밝힌다.) 



주방 살림에 윤기를 더했던 베이킹도구와 꼬마 손님을 위해 남겨둔 식판들, 벽트리 같은 인테리어 소품과 여분의 커피용품을 떠나보냈다. 덩치가 크진 않아도 살림의 뼈대가 아니라 판단되는 것들은 미련 없이 정리했다. 여러 형태의 삶을 시도하느라 너무 많은 물건을 벌여두고 살았음을, 때로는 추억이라는 덫에 단단히 걸려, 어떤 날은 막연한 미래를 대비하느라 너무 많은 짐들을 이고 졌음을 뼈저리게 인정했다. 군데군데 잉여의 물건이 빠져나간 자리가 솎아낸 머리칼처럼 가벼워지고 있었다.

  




  

한편 내 생전 가장 큰 규모의 중고거래가 미국에서 이루어졌다. 무빙 세일(Moving Sale)을 통해 미국집 이전 거주자가 사용해 온 가전과 가구, 살림살이 일체를 고스란히 넘겨받게 된 것이다. 미국은 우리처럼 트럭 이사가 쉽지 않은 환경이라 그런 식의 살림 양도가 이뤄진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었다. 다만 살림이란 본시 제 취향에 맞게 물건들을 하나하나 들이기도, 내보내기도 하는 재미인데, 뭔가 커다란 게 빠진 느낌이다. 발품 파는 과정이 생략된 채 통째로 넘겨받은 살림을 과연 온전히 내 살림이라 할 수 있는 건지, 심경이 조금 복잡하다.



이 와중에 서두름쟁이 남편은 무빙 거래에 따른 계약금 지불을 마쳤다며 싱글벙글이다. 콜밴 사이트를 통해 인천공항까지 우리를 실어다 줄 11인승 밴(Van)을 예약했고, 지금은 현지 차량 등록에 필요한 ID card 발급절차를 밟아나가는 중이란다. 우리 네 식구와 10개 남짓의 여행 가방을 실을 길쭉하게 잘 빠진 밴 사진을 보자 가슴이 털컹 내려앉는다. 누가 봐도 목표를 더욱 뾰족하게 해야 될 때가 아닌가. 할 수 있다, 해낼 수 있다. 나는 무려 당근 온도 99˚C, 중고거래 시장에서 내로라하는 초고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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