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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지현 Apr 30. 2024

왜 처분 못하나

살림이라는 관성 앞에서

남편이 미국 집 계약을 마쳤다. 해외 장기 연수에 선발된 지 한 달이 채 안 돼서였다. 워낙 매사에 빠른 사람인 줄은 알았지만 솔직히 이 정도의 추진력일 줄은 몰랐다.



한동안 그는 이주 지역 한인 카페를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구글 지도와 질로우(미국 부동산 온라인 플랫폼)에도 수시로 접속해 주변 환경과 시세, 학군 등을 살폈다. 그러던 중 한 한인 가족과 연락이 닿았다. 8월 초 귀국을 앞두고 살던 집을 내놓은 가정이었다. 이사 시기나 살림의 규모가 우리와 잘 맞아떨어졌다. 그분들의 도움으로 부동산 중개인(리얼터)과 연결되었고 계약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메일로 보내온 촘촘한 내용의 계약서에 사인을 했고 두 달치 임대료를 송금하는 것으로 계약은 성사됐다.



남편이 집 계약 과정에서 카톡으로 보내왔던 사진 몇 장을 나는 희멀건한 눈으로 다시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순조로운 절차 속에서 막 계약을 마친, 짧지 않은 기간 둥지를 틀게 될, 다름 아닌 미국 우리 집이었다.



널찍한 공간과 멀끔해 뵈는 집안 정경이 어딘지 모르고 낯설고 먹했다. 이유는 하나였을 것이다. 미처 떠날 준비가 되지 못했다는 것. 겨울 옷가지와 신발들, 전집 몇 질을 처분한 로 주변 정리에 더는 진전이 없는 상태였다. 그것은 여전히 갈피를 못잡고 이러저리 흔들리는 마음 상태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일이었다.   




앞서 밝혔듯 1년 미국행을 앞두고 우리 부부의 역할은 달랐다. 남편은 미국 생활에 주초를 놓는 일을, 나는 한국 살림을 정리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남편은 손대는 일마다 일사천리였다. 그에 비하면 나의 일처리는 어떠한가. 손뼉도 맞아야 소리가 난다는데 이 단순한 진리 앞에서 나는 얼굴이 붉어지고 만다. 사실 이제 와 커밍아웃인데, 여태껏 벌여 놓은 살림이 정돈될 기미란 조금도 보이질 않는다. 특히 주방살림이 그렇다. 어째 살림살이가 자꾸 불어나는 건지, 정말 그러면 안 되는데,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름의 속사정은 있다. 살림의 팔 할은 식구를 지어 먹이는 일이다. 주방살림의 비중이 절대적이다. 그런 탓에 쓸모와 취향에 맞는 조리도구와 식기, 반찬통 하나하나가 중요하다 못해 각별하다. 그것들을 선뜻 중고시장에 내놓을 수 있겠나. 찬기 하나하더라도 저마다의 표정과 온도를 간직하고 있는데. 계절, 날씨, 그날의 음식, 그리고 요리하는 사람의 기분과 감정에 따라 매끼 상차림을 달리하게 마련인데.  




주운 유리병에 대저토마토소스를 가득 채운 날/ 새로 들인 일식 식기로 차린 밥상


이쯤 해서 이실직고합니다. 저는 지난주 '초록마을'에서 봄맞이 빅세일이라며 8만 원 이상 물건을 사면 락앤락콜라보 반찬용기(락앤락 x초록마을)를 준다길래 꾸역꾸역 금액을 채워 장을 봤습니다. 정사각 300ml 내열 유리 용기야말로 두 끼 분량의 반찬을 담기에 맞춤이란 걸 살림을 살면서 여실히 깨달았으니까요.



분리배출을 하러 아파트 수거장에 갔다가 공병을 무려 세 개나 주워오기도 했습니다. 입구와 몸체가 모두 넓어 내용물을 넣기 수월한, 주방 살림에 쓸모와 낭만을 더할 요긴한 아이템이었습니다. 물론 버려진 유리병과 첫 눈맞춤을 했을 땐 멈칫했지요. '네가 지금 이걸 주울 때냐' 스스로를 나무라면서요. 그러나 얼마안 가 그 핀잔을 상쇄할 만한 생각들이 밀고들어왔습니다. '붉게 숙성한 대저토마토로 소스를 만들어 담으면 얼마나 근사할까', '봄을 이대로 보내기 아까운데 딸기잼 두어 병은 졸여 둬야 하지 않나', 하는 류의 기운찬 살림 의욕이었습니다.      



그러다 결국 오늘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살짝 사고를 친 것 같기도 합니다. 무려 2인조 12p 일식 식기세트를 들였지 뭡니까. 당근마켓에 올라온 새제품이었는데 양심상 찜만 해놓고 두고 보자 했습니다. 그러기를 수 주일, 판매자가 가격을 내리고, 또 내릴 때마다 어떤 임자가 불쑥 나타나 물건을 훅 주워갈까 가슴을 졸였습니다. 결국 매물가가 본래 제시한 금액의 딱 절반이 되던 날 (그날이 오늘이었습니다), 저는 그릇과의 숙명적 인연을 직감하고는 결국 욕망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날 저녁 식구들로부터 '있던 그릇들을 팔아도 시원찮은 판에 새 걸 사 왔네' 하는 지청구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저도 할 말은 있었습니다. '우리 늘 코렐 무지만 써 왔잖아. 이제 곧 여름인데 푸른 물결무늬가 시원해 보이지 않아?', '한 번쯤 일식 식기를 써보고 싶었거든', '평일 낮에 혼자 밥 차려먹을 때 잔반이라도 이 그릇에 담아먹으면 스스로를 대접하는 기분이 들 것만 같아서'. 그러자 마음 착한 식구들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주더군요.





살림에는 관성이 있는 게 분명하다. 관성을 거스르지 못해 하루, 또 하루 기꺼이 다람쥐 쳇바퀴를 돌린다. 아마도 이 집을 뜨는 날 마지막으로 하게 될 일은 정성스런 끼를 지어먹는 일일 거라 생각했다. 자고로 든든히 집밥 한 그릇 지어먹고 출발해야 속도 편하고 긴 여정이 순탄할 거라 굳게 믿으면서.



이 많은 살림을 처분하고 미국행 비행기를 탈 생각에 여전히 마음이 어수선하지만 한 가지 작은 다짐을 다. 이 집에 머무는 동안 매끼 건강한 음식 지어먹으며 몸과 마음을 잘 돌보겠다는 다짐 이다. 큰 애착을 두어온 주방 가재들을 변함없이 소중히 다루면서. 여느 계약서로 맺은 계약 관계보다 훨씬 질기고 굳건한 그것들과의 인연에 감사해 마지않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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