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달의 첫날에는 의식처럼 새 원두를 들인다. 이것은 주부라는 빛없는 자리를 이탈치 않고 또 한 달을 묵묵히 지켜낸 스스로에 대한 작은 보상이다. 선물처럼 주어진 새 날들에 대한 기대의 발로이기도하다. 이달의 원두에서는 어떤 향기가 날까, 호기심에 부풀어 단단히 여며진 원두의 포장을 풀고 드리퍼에 물줄기를 가늘게 흘리며 시향 하는 순간을 끔찍이도 사랑한다.
보통은 테라로사에서 내놓는 500g짜리 ‘이달의 원두’를 사는데, 원두를 거의 비워낼 즈음엔 동일한 맛과 향에 지쳐가는 면이 없지 않았다. 그럼에도 합리적 가격으로 이만한 커피를 오래도록 곁에 두는 게 어디냐며 자신의 선택에 만족하며 그럭저럭 잘 지내오고 있었다.
그러다 오늘 커피를 잘 아는 지인의 추천으로 에스프레소 바에 들러 250g 원두를 샀다. 에스프레소를 주력으로 하는 카페라면 질 좋고 신선한 원두를 취급할 거라는 기대가 컸다.
“볶은 지 이틀 된 콩이라 이삼일 더 두었다 드셨으면 해요”
주인장의 다정한 한 마디 말이 신기하게 마음을 차분케 했다. 막 볶아낸, 미처 숙성을 마치지 못한 원두의 상태가 꼭 지금의 나와 같았다. 5월은 짚고 넘어갈 일도, 찾아뵈어야 할 사람도 많은 달이었다. 짊어져야 할 의무에 급급해 들뜨고 분주한 채로 흘려보낸 날들이 많았던 것이다. 원두의 숙성을 위해 필요하다는 이삼일의 기한이 차분히 뒤를 돌아보고 자신을 다독일 여지를 주는 은유로 와닿았다. 안심이 되는 순간이었다.
“산미는 없고, 대체적으로 고소한 원두입니다.”
“아, 그래요? 드립은 산미 있는 게 좋은데, 아쉽네요.”
“이게 콜롬비아, 인도, 과테말라 블랜딩이라서요. 대신 이거 드셔보세요. 파푸아뉴기니 싱글인데, 바로 드셔도 되고 산미가 좋아요.”
주인장은 뭔가를 슬쩍 끼워 넣어주었다.
그렇게 덤으로 받아온 커피는 꼭 드립백 크기의 포장이었는데, 집에 와 열어보니 2-3인분은 족히 되는 양의 홀빈이었다. 기대 이상의 향긋함에 반짝 몸의 감각이 살아났다. 자두 맛 나는 커다란 눈깔사탕 한 알을 입안에 두고 돌돌 굴리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후미가 유독 좋아 좀 전의 맛이 생각나고 계속해서 찾게 되는 맛. 오늘 사온 원두가 꼭 이런 맛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간절히 바라게 되었다.
The Son Blend
nutty, chocolate, good balance
이것이 오늘 본품으로 들여온 250g 원두 포장지에 적힌 테이스팅 노트의 전부였다. 원두를 설명하는 말 가운데 어떤 류의 꽃이나 과일의 풍미를 언급하는 단어는 어디에도 없다. 최소한의 산미조차 없이 묵직함과 씁쓸함만을 간직한 우직한 맛. 주인장은 이와 같은 맛을 굳이 '고소한 맛'이라 에둘러 표현했지.
다소 무미건조한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남편과 몇 마디 주고받다 보니 새삼 우리의 좌표가 선명하다. 한국에서 보내게 될 날이 두 달 남짓. 일상의 동선을 줄여 살림의 규모를 줄이는 일에 적극 힘을 쏟아야 할 때라는 데에 동의했다. 생각만큼 진도가 나가지 않고, 해도 해도 끝이 나지 않는 게 살림 처분인 것을 한껏 실감하는 요즈음이다. 아이들 영어도 신경 써야 한다. 미국에서 아이들이 다닐 학교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점 또한 마음의 큰 짐이다. 착오 없이 행정 절차를 밟아나가자면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에게 6월은 잔인한 달이 될 것 같다. 계절과 일상이 가져다주는 향기와 즐거움에 취하기보다 의식적으로 자중하고 자족하는 매일을 살아내야 할 테니. 봄의 절정에 다다른 날들 사이로 6월 하늘은 저리도 높고 푸르기만 한데. 한동안 잊고 있었던 것 같다. 원두 본연의 맛과 향에 취하게 되는 커피도 있지만, 큰 일을 앞두고 몸을 각성시키려 입에 털어 넣는 커피 본연의 기능도 있음을.
무엇보다 남겨진 날들을 의미 없이 흘려보내지 않기로 한다. 밥도 꼭꼭 씹어야 탈이 없고, 향기로운 커피일수록 찬찬히 음미하게 되듯, 남겨진 하루 또 하루를 성실하고 용기 있게 마주해야지. 지금껏 나와 내 가족에게 기꺼이 곁을 내어준 사람들에게는 작은 친절, 작은 다정을 베풀어야겠다. 그렇게 제 할 일을 묵묵히 감당해 내는 삶이라면 제 나름의 향기를 풍길지도 모르겠다.
nutty, chocolate, good balance, 그리고 몰두와 집중. 이것이 이달의 원두가 내게 일러준 테이스팅 노트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