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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지현 Aug 20. 2024

한국을 뜹니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쿨가이와의 계약은 순조롭다 못해 흥미로웠다. 믿으실지 모르겠으나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그 순간까지 그는 들어와 살 집을 보지 않은 상태였다. 우리가 딱 1년 외국에 나갔다 올 거라 하니 그는 그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는 옷가지만 들고 갈 거라 짐이 진짜 없어요. 많이 놔두고 가세요.”

그의 선선한 대답과 함께 방방 넉넉한 수납공간이 유혹하듯 뇌리에 스쳤다.

 ‘에잇, 아무리 그래도 그건 도를 넘는 거잖아.’

 끓어오르는 욕심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겨우 난 이렇게 물었다.

 “이해해 주신다면 베란다 창고만 저희가 좀 써도 될까요?”

 “그럼요, 쓰세요, 쓰세요!”

세도 주면서 귀한 공간도 빌어 쓸 수 있게 된 건 무슨 상황인 건지, 몸과 마음의 무거운 짐을 단번에 내려놓을 수 있게 된 인연에 눈물겨웠다.



살림 막바지 정리야말로 피를 말릴 만큼의 치열한 한판 승부가 될 거라 여겼는데, 게임이 이리도 쉽게 풀릴 줄이야. 친정과 시댁, 두 집으로 가야 할 짐들이 고스란히 베란다 창고로 향했다. 아끼는 살림살이와 끝내 처분 못 한 물건들이 테트리스 고수의 솜씨 아래 네모 반듯한 3층 공간에 촘촘히 쌓였다. 베란다 한 평 공간은 남은 짐들을 맡기기에 크게 부족하지 않았다. 그건 아마도 두어 달 가까이 꾸준히 물건을 팔고, 나누고, 처분해 온 덕이라고 웃으며 스스로를 치하했다.





그럼에도 캐리어 지퍼의 최종 잠금 앞에서 생사의 갈림길에 선 물건들이 많았다. 이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더는 주춤할 시간이 없다는 점. 취사선택의 결단이 즉각 내려져야 했다. 그것은 본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나는 냉철했고, 대담했으며, 판단은 전에 없이 빨랐다.



냉장고를 완전히 비워내는 일만은 혼자 힘으로 역부족이었다. 첫째 아이를 낳았던 때 이후로 이토록 친정 엄마의 도움이 간절한 적이 없었다. 나는 즉각 친정 엄마께 손을 내밀었고, 엄마의 도움으로 냉장고 안팎 모든 식재료를 정리했다. 그뿐 아니었다. 엄마는 된장, 고추장은 물론이요, 손수 농사지은 들깨로 방앗간에서 갓 짜온 들기름 몇 병과 직접 말려 보관한 시래기를 캐리어 하나에 꽉꽉 채워 넣어주셨다.





밤을 꼬박 새워가며 만들어낸 짐은 정확히 16개였다. 화물용 수하물 8개, 기내용 수하물 4개, 백팩 2개, 보스턴백 2개로 그것들은 항공사 규정이 허용하는 최고치 용량의 짐이었다.



집을 떠나오기 전 쿨가이에게만은 감사의 표시를 하고 싶었다. 선물 받은 뒤로 보관만 해 오던 양주 한 병과 손글씨 메모를 가만히 아일랜드 식탁에 올려두었다.

‘선생님, 입주 선물로 준비했습니다. 이곳에서 편안한 1년 되시길 바랍니다.’



추리고 추린 짐들을 마침내 새벽 밴에 실었다. 살림 정리의 긴 여정을 마치고 마침내 자리를 뜨게 된 그날의 심정이란 홀가분함이나 기대감과는 다소 거리가 먼 것이었다. 먹먹했고, 미련이 남았으며, 이유 없이 조심스럽고 불안한 마음이 들기조차 했다. 후텁지근하고 끈적한 한여름밤공기가 가라앉은 마음을 더욱 심하게 짓누르고 있었다.



유일한 위안거리는 이국 땅 새 터전에서 살림의 밑천이자 종자 노릇을 할 캐리어 속 물건들이었다. 그렇게 귀하디 귀한 살림살이를 싣고 우리는 공항으로 향했다.




밴에서 확인한 남편의 계좌에는 거금 *천만 원의 입금액이 찍혀 있었다. 보증금과 연세가 정확히 합산된 금액으로 쿨가이가 보내온 것이었다. 약속한 입주일을 무려 1주일씩이나 앞두고.



쿨가이 아저씨가 내게 말하는 것 같았다. 이곳에 남겨진 인연과 살림, 가족들 걱정일랑 싹 다 잊고 그저 잘 다녀오라고, 좋은 것 많이 보고 느끼고 몸 건강히 잘 살다오시라고 말이다. 나야말로 쿨해져야 할 시기가 아닐 수 없었다.


 


* <시한부 살림> 마지막 화 발행을 목전에 두고 몸과 마음이 큰 압박에 시달렸습니다. '떠나기 전에 얼굴 한번 보자' 했던 지인들과의 약속을 줄줄이 취소하고 오직 짐 싸는 일에 골몰해야 했으니까요. 미국 땅에 무사 입성 후 짐을 풀고 얼마간 마음의 안정을 찾은 뒤에야 이 글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한국 살림 정리 분투기, <시한부 살림> 연재를 마칩니다. 변함 없는 마음으로 부족한 글을 응원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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