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국을 한 주 앞둔 나는 막판 물건 정리에 총력을 다하는 중이었다. 먹을거리는 먹어치우고, 생활용품은 부지런히 써서 해치워 버리고 끝까지 미련이 남는 책들은 없는 짬을 내 읽어치우려 애를 썼다. 미처 팔아치우지 못한 물건들은 지인들에게 넘기거나 폐기를 결정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반가운 소식은 거래의 작은 기미조차 보이지 않던 집 계약 일이 의외로 쉽게 풀렸다는 사실이다. 집을 보러 오는 사람조차 없는 절박한 상황에서나는 당근 부동산 섹션에 광고비 얼마를 들여 매물을 홍보하던 참이었다. 간절한 노력의 결실이었던지 오래지 않아 한 남성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는 대뜸 이렇게 물었다. "보증금 OO에 연세 OO은 안 될까요?"
그의 말인즉슨 1년 치 월세를 한꺼번에 지불할 테니 애초 우리가 제시한 월세 금액을 깎아줄 수 없느냐는 것이었다. 사실 그가 제안한 에누리 금액은 그리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이렇게라도 집을 뺄 수 있는 게 어딘가 싶어 두말없이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연세로 주신시면 맞춰드리겠습니다."
"계좌 보내주시면 지금 계약금 백만 원 보내겠습니다."
"근데 진행하시기 전에 오셔서 집을 한번 보셔야 하지 않나요?"
"괜찮아요. 제가 혼자 살 거고 옷가지만 들고 갈 거라서요."
"아, 그래도......"
"저 혼자 들어갈 거라 잘 부탁드립니다. 최대한 남겨놓으셔도 됩니다."
"주방 집기까지 전부 놓고 갈 거라 편히 쓰시면 됩니다."
"잘 쓰겠습니다."
애초 '대부분의 가구를 갖춘 풀옵션'으로 소개한 집이었다. 그런데 아차 싶었던 건 에어컨 이야기를 빼먹었다는 사실이었다. 요즘 사람들에게 에어컨이야말로 필수가전 중 필수일 텐데, 뒤에 무슨 탈이라도 날까 싶어 급하게 메시지를 날렸다.
"참고로 저희가 에어컨 없이 지내는 집입니다. 아이들과 8년째 지내왔는데, 큰 무리 없이 살았어요. 여름에도 밤에 창을 닫고 자는 날이 있을 정도로 시원한 집이거든요. 집 보러 오시면 말씀드리려 했는데, 계약금 넣는다 하시니 미리 말씀드립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는 쿨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몇 마디 말이 오간 끝에 거짓말처럼 돈 백만 원이 통장에 입금됐다. 처음 우려와 달리 최소한의 발품으로, 최단시간에 이루어진,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없고 기가 막힌 쿨거래였다.
깊은 안도와 함께 맥이 탁 풀렸다. 그때의 마음이란 안도와 허탈감의 어디 중간이었을 게다. 응당 어려울 거라 예견했던 수능이 터무니없이 쉽게 출제됐던 날의 감정. 자나 깨나 집의 임자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린 게 불과 며칠 전의 일인데, 돌연 일이 성사되고 나니 '에잇 겨우 이거였어? '싶어지는 것이 사람 맘이란 참 간사하기도 하다.
어쨌거나 '최대한 남겨 놓으셔도 됩니다' 했던 그의 한마디 말은 힘이 셌다. 그간 양 어깨에 혼자 짊어져 왔던 살림 처분의 무거운 짐을 단숨에 내려놓는 계기가 되었으니. 적어도 그가 원하는 집은 모든 물건이 말끔히 치워져 있는, 재부팅되어 초기화된 집은 아니었다. 쓰다만 비누를, 반쯤 남은 요리 양념을, 수북이 쌓인 막대걸레 부직포를 그는 오히려 반길 사람이었다.
남편과 나는 처분해야 한다 여겼던 아끼는 CD 수십 장을 책장 한 칸에 보기 좋게 모아두았다. 그것들과 가까운 곳에는 CDP를 올렸다. 매일 퇴근해 돌아온 그가 어쩌면 <김광석 best>와 <이문세 memories>를 즐겨 들을지 모른다 생각하면서. 미처 처분 안 된 양서들도 책장 한편에 나란히 세워두었다. 애써 읽지 않더라도 쇼룸에 놓인 잘 의도된 인테리어 소품 노릇이라도 할 줄로 믿으며.
돈 백만을 찔러 넣은 뒤로 그는 가타부타 연락이 없었다. 계약은커녕 자신이 들어와 살 집을 미리 들여다볼 마음일랑 여전히 없어 보였다.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가 일주일 후면 출국을 해야 하니 빠른 시일 내에 계약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자초지종을 들은 그가 말했다. '부동산까지 갈 거 있나요. 우리끼리 카페에 앉아 계약서 쓰면 되죠. 계약서 써오시면 제가 사인만 할게요.' 이런 쿨한 사람의 끝판왕을 보았나.
그가 너무나 쿨한 나머지 계약금 백만 원 버리는 걸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약속된 계약 장소에 안 나타나는 건 아니겠지? 이제까지 보아온 그의 태도에 기가 눌려 한 번씩 이런 가당치 못한 상상을 한다.
아무리 쉬운 수능이라도 문항 실수를 해서는 안 되잖아.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집중력을 잃지 말고, 마지막 남은 한 문제까지꼼꼼하게 다룰 것. 오늘밤 그런 심정으로 부동산임대차계약서를 써 내려간다. 쿨가이와의 대망의 계약을 며칠 앞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