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있어 글쓰기의 가장 큰 장벽은 재능, 이를테면 문장력과 구성 능력의 결여라기보다는 심한 감정의 기복이다. 때때로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부족해질 때면 어김없이 우울감과 무기력함이 따라붙는다. 불과 며칠 전만 하더라도 생기와 활력으로 가득 차 줄곧 좋은 글을 써낼 수 있을 것만 같았던 '나'는 온데 간데 없다. 졸지에 연필 잡을 힘조차 상실한 나약한 인간으로 추락해 있는 것이다. 무척 당황스럽다.
건강치 못한 감정 상태는 상당 부분 몸의 컨디션과 관련이 깊다. 여자들이 우스갯소리로 말하는 '이 망할 호르몬', 바로 그 때문이다. 생리 시작일을 앞두고 몸이 서서히 무거워지기 시작하면서 기분과 감정도 깊고 어둑한 곳으로 함께 침몰해 간다.
스스로의 감정을 통제할 수 없을 지경이라면 절정에 오른 셈이다. 이쯤되면 뭔가를 잘해보겠노라 애쓰기보다는 손발 따시게 해가며 한잠 자두는 편이 훨씬 현명한 처사일지도. 그렇다면 전쟁의 끝은 어디인가. 끝내 몸이 나쁜 피를 모조리 뱉어내고 나서야 새로운 기운을 얻을 수 있다. 달처럼 그렇다. 서서히 차오르다가 절정에 다다른 후 다시 기울기 시작하는 밤하늘의 달처럼. 억울하기 짝이 없다.
컨디션의 난조가 비단 호르몬 때문이겠는가? 아이가 아파서, 너무 습하고 더워서, 집에 빛이 안 들어서, 미세먼지가 안 좋아서, 코로나 일상으로 손에 물기 마를 날이 없어서...... 가만 버려두면 끝없이 부정적인 소견만 늘어놓다가 시간을 소모하는 것이 나란 존재인 것이다.
한글박물관, 초기 근대 소설(육전 소설) 전시를 감상하며
글은 개인의 삶과 사고, 그리고 감정의 반영이다. 삶에 대한 비관을 물처럼 쏟아내기만 하는 글은 무책임하다. 독자의 삶의 의지를 꺾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독자란 모름지기 작품 속에서 작가의 건강한 자아를 확인할 때 비로소 안도하는 존재가 아니겠는가. 설사 쏟아진 물일지라도 그렇다. 걸레로 훔치든, 깔아뭉개든 어떤 식으로든 결말을 내야 하는 것이 작가의 몫이라면 몫이다.
잘 살아야 잘 쓸 수 있다. 설사 개인의 불평 불만, 혹은 절망과 아픔을 글 속에 녹여낸다 하더라도 글의 궁극에 다다라서는 체념보다는 소망을, 낙담이 아닌 용기를, 그리고 여전히 할 수 있다는 작은 의지를 노래하고 싶다.
작가에게 있어 절실한 것은 탄력회복성이 아닐까? 줄넘기가 어쩐지 그 품성을 품고 있는 듯하다. 두 발로 가볍게 땅을 두드리며 줄을 넘고 또다시 뛰어넘는 동작이 말이다. 줄을 넘는 고통 속에서 몸속 독성이 땀으로 베어나 몸 밖을 빠져나간다. 감정의 찌끼들도 함께 빠져나간다. 하루치 시름과 절망이, 우울과 무기력이 거짓말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몸이 맑아온다. 내게는 이것이 크다.
정신을 맑고 온전하게 유지하지 않으면 내가 쓴 글에서 썩은 내가 폴폴 풍겨 날 것이다. 구정물 같은 상태로 연필을 쥐고 싶진 않다. 맑은 물이 퐁퐁 솟아나는 샘물이고 싶다. 그래서 오늘도 난 줄을 넘는다. '매일 줄을 넘는 것'은 좋은 작가가 되고자 하는 나의 작고 진실한 의지요, 작은 걸음이다.
몸이 무거웠지만 오늘도 기어이 줄을 넘었다. 오늘 써야 할 글을 머릿속에 그려가며 '퐁 퐁' 줄을 뛰어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