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열을 내는 수밖에

매일 줄을 넘는다는 것은

by 서지현


날이 바짝 차져서일까. 요즘 들어 줄넘기가 쉽지 않다. 엄밀히 말하자면 마음을 먹기까지 꽤 힘이 든다. 줄을 넘을 시간이면 어김없이 몇 차례의 망설임이 시작된다. 어느 추운 겨울날 목욕탕 문 앞에서 옷 벗기를 주저하는 어린아이의 심정이 된다.



그런 아이라도 안다. 어찌 됐든 알몸을 탕 속에 들이밀거나 샤워기의 따끈한 물줄기에 몸을 맡기면 그 즉시 맘이 달라진다는 걸. 우리 집 꼬마에게 한 두 번 당하는 일이 아니다. 씻기 싫다며 생떼를 부리는 녀석을 우격다짐으로 욕실에 욱여넣고 나면 아이는 그 길로 함흥차사, 얼마 안 가 콧노래가 문 틈으로 새어 나온다.

"씻기 싫다며 왜 안 나와?"

하고 물으면,

"따뜻한 물이 너무 좋아서 헤어지기 싫어."

한다. 사람이란 이렇게 간사하다. 온도에 이리도 약한 것이다. 목욕탕 문 앞에서 주저하는 이여, 일단 들어가라.






추위에 대처하는 내 나름의 방식에 대하여. 기본적으로 난 몸이 찬 사람이다. 추운 겨울날 밤이면 남편 몸을 끌어안고 잔다. 실상은 내 편에서 일방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니 '매미처럼 그의 몸에 붙어' 잔다는 표현이 옳을 지도. 남편은 나와 달리 몸이 몹시도 더운 사람이다. 한겨울에도 열이 달아오른다고 팬티 바람으로 집안을 서성인다.



그는 기꺼이 내게 인간 보일러가 되어주었다. 난 그에게 빌붙어 잔다. 그의 신체에 밀착해 되는대로 몸을 비벼대며 그 몸의 온기를 힘껏 힘입다 보면 추운 밤이 그럭저럭 지나간다. 나에겐 무척 잘된 일이다. 남편도 썩 싫은 눈치는 아니다. 부부의 몸이 온도 차가 나는 것이 때로는 애정을 유지하는 좋은 구실이 된다는 걸 알았다. 깊어가는 겨울, 부부간 정과 사랑이 함께 깊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다른 이유는 아닐 것이다.



추위에 약한 내가 가진 또 한 가지 약점에 대하여. 겨울철만 되면 이사병이 도진다. 완벽하게 동쪽으로 앉은 우리 집엔 볕이 귀하다. 이른 아침 베란다 창을 타고 들어온 해가 거실에 머무는 시간은 기껏해야 서너 시간, 엉덩이를 붙이기 무섭게 쑥 빠져버리고 마는 아침 햇살이 하냥 얄밉다.



양기 부족으로 좌불안석하는 마음이 쉬 달래질까. 집에 해가 안 든다고, 정동향 집이 별 수 있느냐고 푸념만 하염없다. 집의 입지가 어쩌네 저쩌네, 불만 불평을 한껏 토해내고 나면 몸에 열이 좀 오르는 것 같기도 하다.






달이 태양의 빛을 받아 빛나듯, 언제까지 반사적 광영을 힘입어 살 것인가. 노년이 되어서도 여전히 잠자리에서 빌붙는 아내를 남편은 더는 달가워하지 않을지 모른다. 일 년 열두 달 가운데 서너 달씩이나 계절을 빼앗긴 심정으로 살아갈 일을 생각하면 썩 억울하다. 더는 물러설 수가 없다. 스스로 열을 내는 수밖에.

20200905_190759.jpg 아이들은 석양이 지도록 놀이터를 뜨지 않는다



오늘도 줄 하나를 꿰차고 놀이터에 나갔다. 싸늘한 가을날의 줄넘기는 새로운 도전이요, 새로운 맛이다. 몸에 걸치고 있던 외투를 과감히 벗어버지고 타닥타닥 줄을 넘기 시작한다. 망설임을 넘어 줄을 넘기 시작한 순간 작은 성취감이 밀려온다. 그리고 그제서야 어제와 다름없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다만 달라진 점이 있다. 제법 오래도록 줄을 넘었는데도 땀이 나질 않는 것이다. 대신 배꼽을 중심으로 배 주변이 간질여온다. 마치 터져 나오려는 재채기에 앞서 코끝이 근질거리는 것마냥 그렇다.



'근질거리다'의 사전적 의미 가운데 '참기 어려울 정도로 어떤 일을 자꾸 몹시 하고 싶어 하다'라는 뜻이 있다. 별안간 평소의 목표치와 상관없이 화끈하게 줄이 넘고 싶다. 혈류량이 갑자기 많아져서인가. 몸은 달아오르는데 땀구멍이 열릴 듯 말 듯 못 참을 지경이다. 이참에 땀꾸멍을 확 뚫어버릴까? 없던 오기마저 돋는다.





해가 기운 놀이터. 할머니 한 분이 아이의 외투를 한손에 들고 아이 뒤를 따라다니며 연신 말씀하신다.

"추우니까 제발 이것 좀 입어, 입어"

아이는 역력히 싫은 기색으로,

"안 추워. 하나도 안 추워. 진짜라니까."

라고 볼멘소리를 한다.



옷깃을 단단히 여민 채 벤치에 앉아 담소를 나누던 엄마들이 아이더러 '가자, 가자' 한다. 추워서 더는 안 되겠단다. 그때만큼은 나도 '하나도 안 춥다'며 하나같이 잡아떼는 아이들 편이 된다. 그리고 이렇게 한마디 내뱉어 아이를 거들고 싶어진다.

"조금 더 놀게 두세요. 정말로 하나도 안 춥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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