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그날 같은 주부의 삶이 이어진다. 식구들을 살뜰하게 보살피며 얻는 정신적 유익이 크지만 스스로를 향한 도전이나 성취가 없다는 게 다소 쓸쓸하다. 하루가 다르게 훌쩍 커가는 아이들이 기특하다가도 문득 빠르게 흐르는 세월에 황망해진다.
그새 흰머리가 늘었다. 새치가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을 때만 하더라도,
"너는 내가 아니야."
라고 말하며 가차 없이 뽑아내 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우후죽순으로 돋아난 흰머리는 제법 넓은 영역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굵고 뻣뻣하며 반짝이기까지 하는, 내 본래 머리칼과는 확연히 다른 존재들, 그 이질감 앞에서 난 하릴없이 묻는다.
"넌 대체 누구냐. 네가 나란 사실을 어떻게 인정하며 받아들여야 한단 말이냐."
언제 이렇게 물들었는가.
인생의 어느 국면인가를 훌쩍 뛰어넘은 기분이다. 한 계절이 가고 또 다른 계절이 불쑥 찾아온 것과 같이. 그것은 한 시기를 통째로 잃어버렸다거나 도둑맞았다는 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다만 아이를 낳고 키우며 보내온 지난 10년의 세월이 잘 정리되지 않은 것만은 틀림없다.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극적이고 변화무쌍했으며, 심지어 예측 불허한 일들로 가득했던 지난날들이 뭉뚱그려진 채로 머릿속 한 구석에 처박혀 있다.
뭐랄까, 깨알 글씨로 사랑 고백이 가득 적힌 편지지라고 표현하면 좋겠다. 그 종이가 어떤 연유로든 꼬깃꼬깃 접힌 채로 방구석에 버려져 있는 형국이다. 종이가 찢어지지 않게끔 조심스레 펼쳐서 내용을 확인해야 할 일이다. 설사 받아들이지 못할 고백이라 하더라도 사랑 고백은 그 자체로 설레는 일일 터인데, 하물며 그것이 내 편에서 마음을 두고 있던 대상으로부터 라면? 출산과 육아로 점철된 나의 지난 10년이 꼭 그와 같다.
사회생활을 접고 앞치마를 두른 채 살아온 그간의 삶이 무의미하거나 형편없지 않았다. 다만 분주했고 당장의 의무에 버둥거렸다. 여유를 가지고 충분히 누리질 못했다. 본분을 다한답시고 정작 스스로를 챙기지 못했다. 한마디로 서툰 나날의 연속이었다. 이제 와서라도 지난날의 의미를 되짚고 흘려버린 기쁨을 되찾고 싶은 게다.
오늘도 양손에 줄을 야무지게 쥐었다. 어깨 너비로 발을 벌린다. 땅을 단단히 디디고 설 때의 든든한 느낌이 좋다. 하루치 목표량, 2000개. 그것을 염두에 두고 산을 오르는 자의 심정으로 숨을 크게 한번 고른다.
가볍고 경쾌한 뜀으로 줄을 넘기 시작한다. 기분이 가히 나쁘지 않다. 줄은 예외 없이 하나에서부터 시작한다. 하나, 또 하나, 정직하게 줄을 넘으며 하루의 분초를 또렷이 의식한다. 분초라도 거저 흘려보내지 않으리라. 줄을 넘어서는 실감으로 그렇게 매 순간을 의식하리라,
서서히 몸이 무거워진다. 특히 단단하게 굳어진 종아리가 피로를 호소해온다. 그만 주저앉고 싶다. 이때만큼은 몸의 모든 부위가 나 몰라라 하지 않고 한 목표를 향해 기꺼이 하나가 되어준다. 가까스로 고비를 넘기고 나면 등줄기와 이마에 촉촉하게 베어난 땀이 시원하다. 어느새 온몸이 리듬을 타고 있다. 이쯤 되면 한참이나 더 줄을 넘을 수 있을 것만 같다.
각각의 줄이 몸에 와 닿는 느낌이 제각각이다. 조금 거짓말을 보태면 2000개의 줄이 2000가지 느낌으로 다가온다. 목표치를 채우는 20여분의 시간 동안 몸이 지닌 감각이 총동원된다. 결코 길지 않은 시간 안에 많은 감각을 몸과 마음으로 느낀다.
나의 하루란 똑같은 일의 끝없는 반복이라 생각한 적이 많았다. 실상은 그렇지 않을지 모른다. 2000개의 줄을 넘을 때 몸에 와닿는 느낌이 제각각이듯.설사 답답하고 지루한 일상이라도 이제는 매 순간을 즐길 수 있을 것만 같다. 자잘한 일상의 의무에도 얼마간 열정과 힘을 실을 수 있을 것 같다.
줄이 유연하게 넘어갈 때도 있지만 잘 되지 않을 때도 있다. 줄이 심심찮게 발에 걸리기도 하는 것이다. 그럴 땐 호흡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려 애를 쓰며 태연하게 줄을 넘는다. 99번째 줄을 넘어서지 않으면 100번째 줄은 없다. 중요한 것은 99번째 줄을 기필코 넘어서야 하는 주체는 '나'란 사실이다. 시간이 주인이냐, 내가 주체냐. 의심할 여지 없이 나다.
더 이상 시간은 저들끼리 귀엣말로 속닥이며 나도 모르는 새 훅 지나가 버리지 않을 것이다. 한 발, 한 발 줄을 넘는 실감으로 그렇게 시간을 밟아나가야지. 별볼일 없는 하루라 할지라도 마음을 활짝 열어놓을 테다. 몸의 모든 감각을 총동원해서 그리할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