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 넘을 땐 말 시키지 말 것

매일 줄을 넘는다는 것은

by 서지현

설거지를 할 때면 고무장갑 안에 면장갑을 껴버릇했다. 아이가 언제라도 부르면 장갑을 쓱 벗어버리고 달려 나가기 위해서였다. 아이들이 제법 자란 지금은 상황이 좀 나아졌지만 개수대 앞에만 서면 여전히 마음이 조마하다. 어느 틈에 "엄마!"라는 한 마디가 불쑥 치고 들어와 거침없는 물줄기를 단박에 끊어버릴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뭐랄까, 산길을 걸으며 맑은 공기를 큰 숨으로 들이키는데 고약한 담배 연기가 훅 기습할 때의 불쾌한 기분이랄까. 설거지 따위를 감히 기분 좋은 산행에 비유할 건 아니나 '설거지조차' 마음 놓고 순순하게 할 수 없는 처지란.



설거지하는 엄마를 부르거나 방해하지 말아 달란 부탁은 우습고도 설득력이 없다. 단, 엄마가 줄을 넘을 때만큼은 엄마를 부르면 안 된다고 아이들에게 말해두었다. 줄을 넘는 동안에는 엄마가 입을 꼭 다물고 코로만 숨을 쉬는 데다가, 대답하느라 숨이 엉망이 되면 제대로 운동이 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아이들은 의외로 쉽게 수긍하는 것 같았다.



설사 아이가 무심코 엄마에게 말을 걸어온다 해도 대꾸를 안 하면 그만인 것이다. 아이는 뒤늦게라도 엄마의 사소한 부탁을 떠올리며 상황을 이해하게 될 테니까. 줄을 넘는 순간만큼은 누구로부터도 방해받지 않을 권리를 확보한 셈.



어려서부터 유독 엄마에 대한 애착이 심했던 아이들은 놀이터에서조차 엄마를 의식하며 놀았다. 습관처럼 엄마를 부른다거나, 너무 쉽게 도움을 청해왔다. 이도 저도 아니면 하릴없이 엄마 주변을 맴돌았다. 그러던 것이 상황이 달라졌다. 엄마가 놀이터 한편에서 줄을 넘는 동안 아이는 도리어 안심하고 뛰놀게 됐다. 서로 간의 적당한 거리가 도리어 모두를 건강하게 만든 것이다.






내가 줄을 넘는 장소는 대개가 아파트 단지 놀이터다. 아이들이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동안 놀이터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선다. 어깨를 활짝 펴고 두 발로 가볍게 바닥을 두드리다 보면 시선은 자연스레 위로 향하게 된다. 가을날 쪽빛 하늘 위로 한 마리, 그리고 또 한 마리의 새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더니 순식간에 시야 밖으로 사라진다. 어느 누구 하나 지시하거나 명령하는 이 없어도 제 갈 길을 찾아 나는 생명체의 날갯짓이 힘차다.



그리고 바로 그 하늘 아래 쪽빛에 닿을 듯 말 듯 그네를 넘는 이들이 있다. 안전장치 하나 없이 가는 두 줄에 의지해 몸을 던지는 아이들이다. 앞뒤로만 줄을 구르는 게 아니다. 그네가 한계치까지 오르는 순간 아이는 별안간 몸을 획 비튼다. 그 반동으로 그넷줄이 네댓 번 꼬이면서 꽈배기가 된다. 베베 꼬이던 줄이 느려지면서 멈추는가 싶더니 곧 꽈배기가 풀어지면서 반대 결의 꽈배기가 된다. 저 꼬마 녀석은 어지러움을 참는 건가, 즐기는 건가.


배를 그네 안장에 깔고 꽃게 놀음을 하는 아이도 있다. 그네 하나에 아이 둘셋이 달라붙어 되는대로 그네를 부려가며 깔깔거리기도 한다. 그네 안장에 올라선 한 날렵한 아이는 두 손으로 양쪽 줄을 다부지게 쥐더니 텀블링을 한다. 보잘것없는 그네 하나를 가지고서 제 식대로, 기량 놀 줄 아는 아이들의 모습이 당차다.



놀이 조합대의 풍경은 더욱 가관이다. 저들끼리 경도(술래잡기의 일종으로 '경찰과 도둑'의 줄임말)를 벌이는 모양인지 아이들은 비밀스럽고도 부산하게 움직인다. 도둑 노릇을 하는 몇몇 아이들은 숨을 죽인 채 계단과 미끄럼틀을 부지런히 오르내린다. 네댓 계단은 될 성싶은 높이에서 풀쩍 뛰어내리는 아이, 조합대 지붕을 타고 다니는 아이, 이리 보나 저리 보나 겁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이것은 놀이가 아닌 '경도'의 리얼리티가 아닌가 싶은 착각에 빠진다.




머리로 실컷 공부도 해보고, 가슴으로 실컷 사랑도 해봤다. 그런데 몸으로 실컷 놀아본 게 언제였더라. 좀처럼 없었던 것 같다. 아이를 따라 '놀이터'라는 놀이 장소에 뒤늦게라도 입문하게 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그러나 이곳 놀이터에서조차 나이 40줄이 다 된 볼품없는 아줌마를 끼워줄 리 만무하다. 한 번씩 그네를 밀어달라고 부를지언정 선선히 그네 자리 하나 내줄쏘냐. 그렇다고 버젓이 저 놀이 조합대에 올라가 경찰 노릇을 할 것인가, 쫓기는 도둑을 자처할 것인가.



다만 나는 나대로 노는 식이 있다. 놀이터 한편 구석에 자리를 잡기만 하면 된다. 놀이의 구경꾼이자 주역이 될 참이다. 이 세상 가장 순수한 존재들이 벌이는 흥겨운 파티를 구경하는 동시에 혼자서 꿋꿋이 판을 벌인다. 줄 하나로 자연스럽게 내 몸에 말을 걸 수 있게 된 것이 용하다. 두 발로는 제 나름의 속도와 리듬으로 땅을 두들기고, 시선은 최대한 자유롭게 두며, 호흡과 맥박, 그리고 근육의 조여옴과 풀림에 한동안 집중하는 것, 이것이 나란 존재가 스스로를 동무 삼아 노는 방식이다. 누가 뭐래도 아이들 못지않게 흥에 겹다.


IMG_20200925_162426_108.jpg 하루키의 글을 읽으면서 체계적인 몸관리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의 저서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몸의 정직한 느낌에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는 것은 뭔가를 창조하려는 사람에게는 기본적으로 중요한 작업'이라고 했다. 어른이가 되어 막 놀기 시작한 내게, 주부의 영역을 넘어 글쓰기에 몰입한 내게 가까이 와 닿은 말이 아닐 수 없다.


계속해서 줄을 넘을 수 있는 건 근력도, 심폐력도 아닐지 모른다. 결국 그 동력은 내 몸 안에서 만들어지는 흥과 여유가 아닐는지. 러너들이 30분 이상 뛸 때 느끼게 된다는 러너스 하이(Runner's high), 그것의 다른 이름은 '희열'이 아닐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high'의 우리말 발음 표기인 '하이'와 '희열', 공교롭게도 두 음절의 초성이 같다.





아까부터 멀찌감치서 내가 줄을 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한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가 슬며시 다가오더니 천진하게 묻는다.

"아줌마, 뭐 하는 거예요?"

차마 그 물음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호흡의 리듬을 흐트러뜨리지 않게끔 최대한 굵고 빠르게 답을 했다.

"줄넘기."

"그런데 왜 이렇게 많이 해요? 오늘 몇 개 할 거예요?"

이번에는 입을 여는 대신 싱긋 웃으며 눈을 찡긋해 주었다. 다음번엔 '아줌마가 줄을 넘을 땐 말을 시키면 안 되는 이유'를 이 아이에게도 진지하게 말해주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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