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 앞서 치르는 나만의 의식이 있다. 다름 아닌 공들여 집을 청소하고 정리 정돈하는 것이다. 혼자였을 때는 여행에 대한 기대와 설렘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돌진했으나 지금은 아니다. 무작정 장난감을 어지르며 놀던 아이가 이젠 뒷일을 염려하는 어른으로 자라났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돌아와 이어갈 삶을 앞서 생각한다. 자연스레 나의 여행은 집을 정리 정돈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곤 한다.
여행에서 돌아와 집 현관문을 열고 여행 가방을 풀기도 전 가장 먼저 손을 뻗게 될 곳은 어디인가? 반사적으로 손길이 가 닿을 일들을 머릿속으로 순차적으로 그려본다. 그것으로 길 떠나기 전 해야 할 일을 분명하게 깨닫게 된다.
길 떠나기 전 욕실 청소는 단연코 일 순위
욕실 청소는 단연 일 순위다. 최악의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다. 오래간만에 욕실 문을 열었을 때 무채색 타일에 울긋불긋하게 피어난 반점을 마주하는 일은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여행의 감흥과 여운을 너끈히 파괴하고도 남을 상황인 것이다.
냉장고 속 각종 채소로 피클을 담갔다
냉장고 정리는 적어도 일주일 정도로 기간을 넉넉히 잡고 시작한다. 되도록 남은 재료를 소진해서 냉장고를 비워내는 데에 주안점을 둔다. 기존의 찬기를 드러내고 선반을 말끔히 닦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개운할 것이다.
집을 비울 날이 다가오는데 부모님께서 손수 농사지으신 오이를 한 아름 던져주신 날이었다. 내친김에 냉장고 속 자투리 채소를 그러모아 피클 잔치를 벌였다. 여행길에서 돌아와 피클을 반찬 삼아 라면을 끓여 먹는 나름 즐거운 상상을 해가면서. 그새 피클은 새콤아삭하게 맛이 아주 잘 들어 있을 것이다. 대번에 여독이 풀어지지 않을까?
냉장고를 비워내면서 생각한다. 일상과 여행의 경계는 혹 냉장고가 아닐까, 하고. 당분간 우리 집 냉장고 문은 굳게 닫혀있을 것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 평소 겁내던 곳까지 손을 뻗어본다.
달리 보면 여행은 집안 소재의 기회다. 대청소에는 모름지기 구실이 필요한 법, 여행을 빌미 삼아 평소 마음먹기가 쉽지 않았던 영역까지 손을 뻗어본다.
공기청정기와 청소기 필터를 교체하거나 세척해 잘 말려둔다. 방마다 방충망을 떼내어 세척한다. 미세 먼지로 몸살을 앓던 방충망이 이제야 제대로 숨을 쉰다. 내친김에 커피 그라인더를 청소한다. 묵은쌀 한 줌을 넣고 갈아내면 그라인더에 낀 커피 미분을 쉽게 제거할 수 있다.
쌓여온 집안의 예쁜 쓰레기를 처리할 수 있는 호기다. 예쁜 쓰레기란 다름 아닌 아이들의 놀잇감과 작품들이다. 당장은 소중하게 여기지만 시간을 두고 보면 다시 찾지 않을 물건이 있게 마련이다. 일주일 여행 뒤에는 '그것이 있었던가?' 하며 존재 자체를 까먹을 물건들이 분명 있다. 물건을 제대로 구분하기 위해서는 평소 부모가 아이를 잘 관찰해야 한다. 분별력과 센스가 필요하다. 아이와 상의가 이루어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일이다.
이불, 러그, 소파 천과 같은 패브릭 류를 걷어 먼지를 턴 후 단정히 개켜둔다. 바닥 청소는 생략한다. 사람이 살지 않더라도 먼지가 수북이 쌓이는 마법이 틀림없이 일어날 테니까. 설거지를 마친 주방 식기는 완전히 건조해 수납 칸 제자리에 들인다. 여행을 떠나기 전 마지막 식사는 되도록 밖에서 간단히 해결한다. 새로운 설거지거리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다. 마지막으로 쓰레기통을 비우고 음식물 찌꺼기를 처리한다.
여행을 앞두고 엉덩이만 무거워지는 게 아니다. 생각도 많아진다. 일주일 간의 여행을 두고도 이처럼 돌아볼 일이 많은데, 하물며 영원한 길을 떠나는 그날을 대비해서는 얼마나 많은 일들을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하는 걸까. 오늘부터라도 얽힌 인간관계의 매듭을 풀고 삶의 군더더기를 덜어내는 일을 시작해야 하는 걸까.
자, 드디어 최종 점검이다. 정리 정돈을 마친 집은 한결 생활감이 덜하다. 얼추 여행자의 숙소를 닮아 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집 현관문을 열었을 때 어떤 느낌일까? 서서히 마음이 달떠오르기 시작한다. 비로소 낯선 여행지에서 마주할 새로운 일들이 기대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자, 이제 그럼 뒷일은 염려 말고 슬슬 여행을 떠나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