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아버지가 엄마가 차려놓은 아침상을 쳐다도 안 보고 집을 나가셨다. 출근 시간이 아무리 일러도, 무슨 일이 있어도 아침을 거르시는 일은 좀처럼 없었는데... 부부싸움으로 두 분이 말문을 닫은 지 한 달이 다 되어가던 어느 날이었다. 아버지가 아침을 거른 사실이 어린 나에게는 꽤나 큰 충격이었다. 이전에 없던 엄청난 일이 두 분 사이에, 그리고 우리집에 일어날 것만 같은 불안과 초조함이 엄습했다.
아버지가 수저를 들지 않는 밥상은 썰렁하고 허전했다. 아버지가 자꾸만 멀어져 가는 느낌이었다. 왜 '가족'의 다른 이름이 '식구(食口)'인지, 식구가 되어 한솥밥을 먹는다는 게 어떤 큰 의미인지 어렴풋이 깨달아졌다. 그때 나는 하루하루를 세며 엄마 아빠가 함구했던 입을 열어 서로에게 말을 걸고, 또 그 다정한 입으로 한 상에 둘러앉아 한솥밥을 먹을 수 있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랬던 부부는 함께 나이를 먹어가며 서로에게 기대는 일이 많아졌다. 아버지는 먹는 일에 있어서만큼은 엄마에게 아이처럼 의지한다. 따로 밖에서 누굴 만나 식사하는 법일랑 절대 없고, 심지어 결혼식에 가서도 피로연에는 손톱만큼의 미련이 없는 듯 집에 돌아와 밥을 달라 하신다. 가끔 계모임이 있으면 부부가 함께 나가 외식을 하지만 돌아오는 길엔 꼭 '음식 맛이 별로더라'라는둥 '집에서 먹느니 못하다'라는둥 꼭 한 마디 하신단다.
엄마는 아버지가 본인보다 늦게 죽을까 그게 걱정이시란다. '가뜩이나 바깥 음식 못 먹는 사람이 혼자 남으면 입에 맞는 밥도 못 얻어먹고 어쩔 거냐'라면서 걱정 아닌 걱정이 하염없다. 아버지더러 '혼자 남아 멸시당하지 말고 나 죽고 딱 한 달만 더 있다가 오라'고 했다나 어쨌다나. 엄마는 죽을 때까지 아버지 밥 걱정을 하실 모양인가. 밥, 하찮은 이것이 사람의 인연을 이토록 질기고도 끈덕지게 만들 줄이야. 이 금실 좋은 노부부를 보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대략 난감하다.
집밥의 기록들, 밑반찬을 유례없이 많이 만들었던 해를 보내며
집에서 세 끼 밥을 모두 챙겨 먹는다 하여 '삼식이' 소리를 듣는 인생이 적지 않은 줄로 안다. '삼식이'란 일터에서 물러나 가정과 부인 품밖에는 딱히 기댈 곳이 없는 노년의 남성들을 주로 비하하여 이르는 말이다. 나는 간접적으로나마 '삼식이' 소리를 전해 들을 때마다 얼굴이 붉어지며 곤혹스러운 생각이 든다. 집에서 밥 좀 찾아 먹겠다는데그게 그토록 따가운 눈총을 받을일인지, 인생 말미에 이 얼마나 불명예스럽고도 처량한 일이냐 말이다.
실상 집밥은 먹어주는 이가 존재할 때만 성사될 수 있는 쌍방향의 산물이다. 물론 집밥을 짓는 자에게 그 공을 우선 돌리는 게 마땅하다. 한편 그 음식을 먹는 자에게도 지분은 있다. 밥상을 받는 주체가 1인 가족이라 본인이 되었든, 배우자나 아이들이 되었든 내 수고를 인정해주고 내가 만든 음식을 달게 받는 존재가 있다면 그에게 고마워해야 하지 않을까.
늦잠에 든 날 아침 먼저 깬 아이가 가만히 다가와 '엄마, 배고파'하고 속삭이면 배가 고프다는 아이가 무척 사랑스럽게 생각되면서 잠이 순식간에 달아난다. 또 눈에 초점을 잃고 무기력하게 쳐져 있다가도 밥때만 돌아오면 별안간 기운이 솟아나는 건 대체 왜인지. 생각건대 따뜻한 밥을 지어 식구들을 챙겨 먹이는 일에서 얼마간 내 존재 가치를 누리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는 확실히 부부가 외식하는 일이 많았다. 물론 분위기 좋은 식당에서 둘이 오붓이 앉아 음식을 나누는 정취가 좋아서였거니와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솔직히 할 줄 아는 요리가 거의 없었다. 손수 지어먹는 음식의 참맛도 잘 알지 못했었다.
아이 덕에 요리를 해나가기 시작했다. 아이 이유식을 만들면서부터 요리의 기초를 배워나갔다. 재료 손질하는 법, 육수 내는 법, 죽 끓이는 법, 밥하는 법, 그리고 합이 맞는 재료와 그렇지 않은 것들. 이유식 레시피북은 훌륭한 요리교과서였다. 아이의 성장과 함께 요리 솜씨도 늘어갔다. 다를 줄 아는 재료도, 할 줄 아는 음식의 가짓수도 늘고 요리 속도도 빨라졌다. 확실히 나의 경우엔 OO '때문에'가 아닌 '덕분에' 밥을 할 줄 알게 됐다고 말하는 편이 옳은 것 같다.
드디어 아이들이 학교가는 날 아침, 부드러운 호박죽과 카프레제 샐러드
지난 한 해는 꼬박 삼식이들과 함께였다. 기관을 안 가는 날들이 많았던 아이들은 집밥 식당의 단골손님이었고 남편마저도 재택이 많았다. 아무데도 우리를 받아주는 데 없는 세상에서 집밥만은 확실한 피난처였다.
여럿의 삼식이들을 위해 집밥 릴레이를 펼쳐나가다가도 몸과 마음이 지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럴 때면 '밥하는 자'와 '먹는 자', 그 철옹성 같은 역할 구분을 과감히 허물고 때때로 삼식이 노릇을 바꿔야 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더러 했다. 그렇게 된다면야 '삼식이'도 자연스레 요리 기술이 늘어갈 테지. 더 이상 눈치밥먹고 손가락질 받을 일도 없을 테지. 진심으로 삼식이를 응원하게 된다. 그들의 집밥을 향한 일념과 언젠가 이루게 될 완전 독립을!
봄이 오면서 '삼식이'들은 제 갈 곳을 찾아 훨훨 날아가고 '이식이'들만 집에 남았다. 한 끼의 공백이 생기다 보니 그 시간에는 잔반을 꺼내 대충 먹게 된다. 단출하다 못해 허접하게 차려진 내 일인 밥상을 보면서 새삼 날마다 서툰 솜씨로 차려내는 특별할 것 없는밥을 군말 없이 먹어주는 그들이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