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착오적 조직문화가 문제
22년 12월 16일,
일-가정 양립 가능할까
아이가 태어나고 내 삶을 되돌아 보게 된 점은 좋은 변화다. 평소 정치-사회이슈에 관심이 많은 나는 민간 기업이 아닌 비영리 조직에서 일하고 있다. 조직 생활을 하다 보니 비영리 조직은 착할 것이란 생각이 착각이란 걸 깨닫게 됐다. 민간 기업과 목표만 다를 뿐, 사람이 모여서 일하는 건 같아서 일 테다. 비영리라서 부조리한 현실을 견디는 대가가 적은 점은 오히려 불만이다! 그나마 풀타임 첫 직장으로 초기 몇 년은 좋은 부서장과 동료들을 만나 바쁘게 보낸 덕에 이만큼 버틴 것 같다.
내가 일 얘기를 꺼낸 이유는 아이가 태어나고 내 직장관이 바뀌어서다. 즉 '일-가정 양립'이 직장을 보는 중요한 렌즈가 됐다. 연봉, 자기 계발, 복지 등도 중요하지만 아이를 키우기 좋은 곳인지를 먼저 따지게 됐다. 현재까지는 아쉬운 점이 있지만 아이를 키우기에 나쁜 직장은 아니란 판단이다. 생각해보면 아이를 키우기 좋은 직장이 따로 있고, 그런 곳이 소수란 점은 안타깝다. 그만큼 그간 일-가정 양립은 우리 사회에서 큰 관심사가 아니었다는 반증이다.
얼마 전 부모가 된 우리에게 휴직, 육아휴직 급여, 어린이집 등은 어느 하나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내 경우, 아내가 휴직을 하고 있어 육아 부담이 크지 않은데도 그렇다. 뭐가 문제일까? 성공적 근대화로 선진국 대열에 선 우리나라의 외관과는 부합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현대 사회에서 '자유의지'를 갖고 살아간다. 그러나 중세로 따지면, 회사 오너는 지주와 같고 거기에 고용된 우리는 노예와 같은 처지다. 노예라고 하니 떠오르는 이미지가 험악할 수 있다. 그러나 2022년 한국, 조직문화는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 한 곳은 많지 않다. 눈에 보이는 폭력은 사라졌다 해도 이를 대체한 자본의 억압 기제는 교묘하게 작동하고 있다.
내 주위 직장인들을 만나 들어본 실태는 참담했다. 밖에서 보면 누구나 부러워할 법한 회사도 대동소이했다. 조직문화, 특히 일-가정 양립에 대해선 관심이 없다고 하는 게 맞았다. 아내 출산을 앞두고 나는 여러 지인들을 만났다. 우연히도 다양한 직군의 사람들이었다. 공무원(중앙부처, 지자체), 대기업, 학교(중고등 교육기관), 스타트업(유니콘) 등이다. 다양한 직군에서 일하는 이들의 삶은 다른 듯 닮아 있었다. 속속들이 알 수 없었지만 처우나 복리후생에서만 차이가 났다. 결론은 회사가 싫지만 어쩔 수 없이 다니고 있고, 그나마 처우가 좋으면 만족하는 편이었다. 회사란 곳의 부조리함은 상수(constant)였다.
(등 떠밀려하는 걸로 보이는) 육아 지원이 잘 되고 있는 화사도 있었으나 소수였다. 한국 사회에는 여전히 소위 '여자가 다니기 좋은 직장'이 있다. 여기엔 여성이 육아를 전담한다는 불편한 전제가 있다. 물론 일-가정 양립이 가능한 직장을 내 주변에서 찾지 못했을 수 있다. 이를 차치하고도 더 큰 문제는 잘못된 구조에서 퇴사 등 원하지 않는 선택을 강요 받지만, 구조를 바꿀 생각을 못한다는 데 있다. 실질적으로 한국 사회 내 가정은 여성의 희생에 의해 유지됐고, 유지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성이 커리어를 포기하고 육아를 하지 않으면 대안을 찾기 어렵다.
우리 부부도 차례로 휴직을 하는 동안에는 육아를 전담할 양육자가 있지만, 그 후에 대해선 계획도 세우지 못하고 있다. 운 좋게 내년부터 2세까지 다닐 아이의 어린이집 입소가 확정됐지만, 나머지 시간을 어떻게 채울지는 여전히 걱정이다. 지인들의 '현실 육아' 후기에 따르면, 아이가 하나면 어린이집에 맡기고 나머지 시간을 부모나 조부모가 로테이션으로 채우는 게 가능하다고 했다. 그런데 둘이 되면 육아를 전담할 풀타임 양육자가 필요하다고 했고, 그 경우 대개 부부 중 한 명이 퇴사를 택했다. 어쩔수 없는 선택이라고 해도 어렵게 들어간 회사에서의 커리어를 육아로 포기하는 결정은 안타깝기만 하다.
그들은 모두 이름만 대면 알만한 '좋은 회사'로 불리는 곳에 다니고 있었다. 비교적 육아 지원이 잘 된다는 곳이 이러니 아닌 곳은 말도 못 할 법하다. 앞서 육아를 하며 마주하게 된 문제와 마찬가지로, 그간 보육제도 변화에 대한 목소리가 제도권 정치에서 무시된 탓이 크다. 또 여성의 사회 진출이 크게 늘어난 시대 변화를 조직 문화가 따라가지 못한 것도 문제다. 언제까지 여성의 희생을 강요해서 가정을 지속할 순 없다. 여성이 생애주기별로 육아를 반복하며 평생 육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맘고리즘(momgorithm)'이란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란 점을 알아야 한다.
팬데믹으로 다양한 근무형태가 도입되고 사회 인식도 조금은 바뀌었다. (그렇게 믿고 싶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일-가정 양립에 있어 가장 원하는 바는 조직문화 개선, 유연근무제 도입, 출산-육아지원 등 근무환경 개선이었다. 근무환경에 대한 기본적 요구도 해소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할 게 뻔하다. 회사도 여태까진 (비)자발적 노예를 갈아 넣어 조직을 돌아가게 했다고 해도 앞으로는 그래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