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라고 다 같은 부모는 아니에요
22년 12월 20일,
단단한 부모
아이 키우는 부모를 만났다. 아이를 키우며 부모는 성숙한 어른이 된다. 모두 그런 줄 알았다! 부모도 부모 나름이었다. 지난 주말, 4~5세 아이를 키우는 부모와 대화할 기회가 있어 육아 얘기를 듣게 됐다. 120여 일이 지난 은수 얘기를 할 때만 해도, 그 시기 아이 모습을 그리워하는 똑같은 부모였다. 아이를 키우는 시간의 무게는 때때로 아이가 빨리 자랐으면 하는 마음을 갖게 한다. 그들은 아이가 빨리 자라 그때 많은 시간을 함께 하지 못해 아쉽다고 했다. 우리 대화는 그렇게 아이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것에서 시작됐다.
100일 전후 아이는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니 그래도 키울만하단 말이 오갔다. 앞으로 닥칠 육아가 점점 힘들 거란 말을 듣고, 나는 지금부터 힘들다고 하면 안 되나라고 생각했다. 아이는 시기와 관계없이 예쁘고 키우는 재미가 있다는 말도 나왔다. 육아가 힘들지만 이를 잊게 하는 아이의 천진난만한 모습이 있어서 일 테다. 아이가 부쩍 자란 지금도 순간순간 새롭고 신비롭다. 지금은 어떻게 하면 아이와 더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아이의 시간을 꾸역꾸역 채우는 게 아니라, 부모와 함께한 행복한 시간을 체화할 수 있게 하는 방법 말이다.
대화를 시작하며 이 점이 궁금했다. 아직은 어떻게 하면 아이에게 좋은 경험을 선물할 수 있을까란 질문에 적절한 답을 찾지 못해서다. 매일 최선을 다해 아이를 돌보는 아내의 모습에서 부족함을 느낀다. 워낙 부지런한 아내는 육아도 척척박사처럼 잘 해내고 있다. 많은 품과 시간이 드는 일이고, 출산 후 몸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는데도 '100점 만점' 육아를 하고 있다. 아내를 닮은 똘똘한 아이도 씩씩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며 지금은 발달상태로 상위 30%가 됐다. 2주 일찍 태어난 아이가 당시 하위 2%였단 점을 감안하면 괄목할 만한 성장이다.
우리는 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되며 많은 면에서 성숙해졌다. 일단 주변 부모들에 존경심을 표하게 됐다. 모두 같지 않지만, 어쨌든 부모가 되는 일은 겪지 않고는 모를 힘든 일이다. 아이를 키우는 육아는 우리를 돌보게 했다. 우리가 더 나은 어른이 되어야 아이도 잘 자랄 수 있어서다. 생후 5개월 차, 아이가 뭘 알겠냐고 할지 모르지만 우리가 보기엔 그렇지 않다. 또 이만큼의 성장이 모든 아이에게 당연한 게 아니란 걸 감안하면 감사할 일이다. 그동안 부모로 고생한 우리에게도 셀프칭찬을 해본다.
다시, 다른 부모 얘기로 가보자! 중산층 전문직 부모를 둔 소위 '강남 키즈' A는 직장맘으로 4살 딸을 키우고 있다. 대기업에 다니는 남편, 비교적 여유가 있는 부모덕에 육아를 외주하고 있다. 입주 도우미가 집에 상주하며 아이를 봐주고, 근처에 사는 엄마가 손녀를 돌보기 위해 자주 집에 들렀다. 회사에 다니는 A는 육아를 외주 할 수 있는 경제력, 육아를 도와줄 수 있는 엄마가 있어 육아에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A의 말은 달랐다. A는 돌봄을 외주 하더라도 도우미, 아이 일정, 용품 등을 챙기고 관리하는 일은 자신이 해야 하므로 쉽지 않다고 했다.
이에 반해 자영업을 하는 B는 전업주부 아내가 아이를 키운다고 했다. B는 아이를 돌보는 일에 부모님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고 했다. 또 B는 아이가 태어나고, 아내가 직장을 그만둬서 소득이 크게 줄었다고도 했다. 그런데 아이에게 들어가는 비용은 늘어 부담이 컸다고 했다. 듣기만 해도 육아가 힘들어 보였다. 팬데믹 기간에는 월 매출이 줄어 더 어려웠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 이유로 작년까지는 아이를 가정에서 키우다 올해부터 아이를 시설에 맡기기 시작했다고 했다. 올해 매출을 조금 회복하면서 아이를 유치원에 보낼 여유가 생겼다고 했다.
육아를 해본 부모라면 위 사례는 극과 극으로 들릴 법하다. 어떻게 보더라도 A가 더 여유롭게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A는 육아를 외주하고, 부모가 도와주는 환경을 당연하게 여겼다. 세세히 알 순 없지만 자신 주변에는 그런 경우가 많고, 육아에 자신보다 훨씬 더 많은 비용을 쓰는 이들이 흔한 듯했다. 영어 유치원(학원)은 쉬운 옵션으로 들렸다. 오히려 모두 보내는데 자신은 여력이 없어 못 보낸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많이 양보해서 그조차도 선택이라고 해보자! 그러나 애초에 그 선택지조차 없는 이들이 있단 점을 모르는지 아니면, 모른 척하는지 답답했다.
B는 5살 아들을 그간 보육 시설에 보내지 못한 걸 내심 미안해했다. 다행히 아이는 올해부터 다닌 유치원에 잘 적응해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다고 했다. 요즘에는 아이가 친구들을 볼 생각에 아침 일찍 일어나 등원 준비를 한다는 점은 믿기 어려웠다. 최근 몇 년간은 코로나로 또래 아이를 만나지 못하고 집에만 있었으니 아이 입장에선 등원이 신날 법 하다. B는 아이가 최소한의 유아단계 교육을 놓친 게 아닌가란 생각에 미안하지만, 지금이라도 아이가 즐겁게 유치원에 다니는 모습에 위안을 삼는다고 했다. 더는 바라지 않고 아이가 건강하게 유치원 생활을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모든 아이가 다르듯, 부모의 양육환경도 천차만별이다. 차례로 위 얘기를 접하면서 부모도 부모 나름이란 생각을 하게 됐다. 비교에서 벗어날 수 없는 세상에서 주변 어느 집단을 준거(reference)로 두느냐에 따라 건강한 부모로 아이를 잘 돌볼 수 있게 되는 셈이다. 아무리 좋은 환경에서 아이를 키우고 있더라도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그 이상을 바라면, 자신과 아이를 '비교의 덫'에 빠지게 할 뿐이다. A가 그랬다. 어떻게 봐도 더 나은 양육환경에서 아이를 키우고 있지만, B처럼 현재에 감사하지 못했다. 심지어 둘이 처한 양육 환경에는 큰 차이가 있었음에도 그랬다.
물론 둘 다 좋은 부모로 아이를 잘 키웠으면 하는 바람이다. 글로는 비교했지만 실제 대화에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듣기만 했다. 각자 겪는 어려움이 다르고, 또 겪어보지 않은 바에 대해 코멘트하는 건 잘못됐다고 생각해서다. 모든 아이가 잘 자랄 수 있는 최소한의 환경은 분명 존재한다. 다만,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아이가 자신을 기준으로 상-하위 계층 아이를 다르게 대할까 걱정이다. 성장과정에서 계층 정체성을 획득하는 건 당연하지만, 이를 기준으로 주변을 나누는 건 잘못된 일이어서다.
위 사례를 접하면서 우리는 먼저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것에 감사하자”, “잘못된 비교로 우리 삶에 불행이 끼어들게 하지 말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앞으로 우리 부부가 더 단단한 부모로 성장해야 이 원칙을 지킬 수 있을 것 같다. 잘 알려진 노랫말을 바꿔 "(할 수) 있는 사람 있는 대로 살고, (할 수) 없는 사람 없는 대로 산다." 마음 편하게 그렇게 살아야 하나보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부모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