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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앞에서도 삶은, '건너가는' 여정이다

<슬픔을 건너다>

by 시루


“그렇게 죽는 병이지 뭐.”

무심히 툭 뱉고는 혀끝이 썼는지 잠시 휴대폰 너머로 정적이 날아들었다. 평소였다면 무슨 그런 소릴 하냐고 아무렇지 않게 핀잔을 날렸을 나였지만, 가시 박힌 말보다 잦아든 숨소리에 더 속이 상해 입을 다물고 말았다.


검지에서 시작해 왼쪽 손과 팔 전체가 마비되는 동안, 아빠의 정확한 병명이 나오지 않았다. 단칼에 잘린 평범한 일상. 시퍼렇게 날 선 단면 위에 덩그러니 올라서서, 몇 겁의 시간 속을 헤매며 모퉁이를 돌고 또 도는 기분이셨을 거다. 운동신경증 종류가 워낙 광범위해서 얼마 전 돌아가신 친구분과 똑같은 루게릭만큼은 아니길 바라셨는데, 겨우 특정된 진단명이 하필 그것이었다. 잘 버텨오셨던 마음이 크게 휘청이는 소리가 멀리 내게까지 들리는 듯했다.


그리고 며칠 뒤부터 내 전화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계획했던 산행을 다녀오시겠다는 아빠와 바로 주사 치료를 시작해야 하니 아빠를 설득하라는 엄마의 전화였다. 불편한 몸으로 어딜 가느냐 답답해하는 주장도, 치료 시작하면 꼼짝없이 붙잡힐 몸이니 산행은 계속하겠다는 주장도 모두 틀린 말이 없어 곤란했지만, 굳이 한쪽 손을 들자면 난 아빠를 응원하고 싶었다.


의사 말이 옳을 것이다. 한쪽 손과 팔의 신경만 죽어가는 게 아니다. 점점 어깨를 움직이기에도 힘이 드는 눈치다. 진료실에선 대번에 괜찮다 큰소리치셨지만 곧 다리 근육에도, 최악의 경우 호흡기 근육에도 문제가 생길지 모른다. 다초점 운동신경증 쪽으로 일말의 희망을 걸고 1년 가까이 치료를 시도했지만 효과를 보지 못한 채 나빠졌다. 결국 또 한 번 복잡한 검사를 거쳐 루게릭이라 마침표를 찍었지만, 시작할 새로운 주사 치료가 긍정적 결과를 가져올지, 예정된 수순이 어떤 속도로 덮쳐올지 알 수 없다. 아빠가 직면한 모퉁이 담벼락 너머에 작은 불빛이라도 있을지 도대체 누가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 더욱, 산행에 힘을 실어드리고 싶어 역성을 들 수밖에 없다.




누구보다 건강한 삶의 루틴이 있으셨다. 아침마다 꼬박 운동을 하고, 낮에는 농부의 삶으로 땅에서 정직한 땀을 흘리고, 올레길을 걷고 오름을 오르고, 등산 모임을 만들어 늘 몸을 움직이셨다. 우리나라 100대 명산 중 국립공원이 있는 산들을 골라 몇 년에 걸쳐 모두 올랐다. 이제 그다음 작은 줄기들을 이루는 산을 오르자며 지역별로 계획해 놓은 게 바로 당신이셨다.


몇 번의 전화를 반복해 거들어드린 덕분인지, 엄마의 성화가 잦아들고 다행히도 날씨 걱정으로 주제가 넘어갔다. 늦가을 단풍을 보려나 했더니 하필 등반 일정 동안 기온이 영하로 뚝 떨어져 걱정이 새롭게 시작되니, 그냥 엄마가 집어주는 대로 단단히 챙겨 올라오시라고 마침표를 찍어드렸다. 묵직해진 배낭을 살피는 엄마 옆에서, 아빠는 아마도 추가 인원 티켓을 정리하고 등반 코스를 점검하며 몰래 환호하셨을지도 모르겠다.


다음 날, 역성 들어준 딸에게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마니산 정상에 오르면 사진 한 장 찍어 보내시라고 당부했던 나를 기억하셨나 보다. 단풍 운운하며 농담하기는 했지만 사실 불편한 팔이 흔들리다 다치거나, 한 손으로 지팡이를 짚어야 하니 위험할 수 있기에 이런저런 수다를 덧붙였던 것인데.. 다 알고 계시겠지.


“아빠, 가을 산에 단풍 사진은 없고 왜??!”

멀리 바다가 보이는 능선 풍경에 괜한 단풍 타령을 해 보았다. 아빠는 불편한 데 전혀 없고 산이 너무 좋다며 목소리를 세워 말씀하셨다. 참성단이 단군을 위해 제사 지내던 곳이 아니라 단군이 내려왔을 때 직접 하늘에 제사 올리던 곳이라더라, 너는 알았느냐며 지인분께 듣고 신기했던 이야기들을 풀기 시작하셨다.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알고 있다.

“다리도 괜찮았고 호흡도 그대로야. 걱정 마라.”


평소였다면 누구보다 거뜬했을 산세. 왼팔을 쓸 수 없으니 오른손 하나에 의지해 등산 스틱을 짚으며 어떤 마음이셨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뻐근해졌지만 웃으며 통화를 마무리했다. 이 정도라면 내일 산행도 문제없으시겠네 안심하는 웃음이라는 걸 아빠도 아셨을거다.


아빠 삶도 참 굽이지다. 한창 사랑하는 마음이 차오를 때 가족을 잃고, 이제 복이 좀 드나 싶으니 믿음 깨는 일이 생기고, 후회를 지우고 잘 살아보자 하니, 삶이 기어이 무릎을 꿇린다. 아니, 이런 비관적인 마음은 딸의 시선에서 나올 뿐이다. 커다란 바위를 넘고 산길에 지팡이를 꾹꾹 짚어 오르는 걸음은 조금이라도 더, 삶을 살아내려는 의지라고 바꿔 생각하는 게 옳을지 모른다. 감히 짐작할 수 없지만 부디 희망을 품고 계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 또한 농을 섞어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고서야 마음이 가벼워졌다.



<슬픔을 건너다> 홍승연

새빨간 표지 위에 하얀 뒷모습과 그림자가 덩그러니 눈길을 끄는 그림책이 있다. 홍승연 작가의 『슬픔을 건너다』 내지 첫 장면이 아빠를 향한 내 마음과 닮아 가끔 떠오르고는 한다. ‘당연했던 일상이 간절한 희망으로 변해’ 버린다는 게 어떤 모습인지, 그림책 면지 가득한 빈 간격과 뚝뚝 잘려 서 있는 사각기둥을 보는 순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위에 홀로 웅크린 듯 서 있는 외로운 그림자. 건너갈 수 있을지 가늠조차 안 되는 먼 기둥 위에 한때 내 것인지도 모를 또 다른 그림자가 서 있다.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 겪어보았을 그날이 검은 그림자로 떠올라 마음을 흔든다. 한번 뒤집힌 일상은 어둠으로 침잠하여 고립된 ‘나’를 알아채더라도 달라질 게 없는 암흑의 시간. 그저 견디기에도, 어떻게든 빠져나오려 애쓰기에도, 마치 무중력 상태의 꿈처럼 아무것도 감촉할 수 없는 막막한 시간을 펼쳐보면 그것이 ‘슬픔’의 질감이 아닐까.


『슬픔을 건너다』 속 검은 그림자에게는 다행히도 빨간 새 한 마리가 다가와 의식을 깨운다. 아주 작은 날갯짓을 따라가 마주한 나의 새로운 기억, 어둠을 뚫고 나올 빛을 스스로 발견하는 과정이 아빠의 등산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다시 펼쳐 안고 한참을 읽었다. 모든 것을 잃을지 모르지만, 아직은 현재를 짚어가며 큰 호흡 한 번에 힘을 주고 산을 오르는 마음. 그림책의 검은 그림자가 자신 안에 품었던 먼 과거의 빛과 포옹했듯, 그렇게 찬찬히 당신 안의 무엇들을 더듬어가며 결을 다듬고 계시리라 믿는다.


어쩌면 삶은 건너가는 여정이겠다. 반짝이는 순간들을 건너기도 하겠지만 깊은 수렁과 슬픔을 어떤 방식으로 건너갈지 스스로에게 묻고, 보폭을 가늠하고, 한 발 크게 내딛는 순간들의 연결. 가장 크게 좌절했을 당신이 가장 먼저 용기 내어 단단히 짚고 일어서 주셔서 감사한 마음으로, 다음 산행에 쓰실 챙 넓은 모자 하나 보내드려야겠다.






# 굽이진 모퉁이

# 잘 건너가요,우리


* 시루서재 Blog

: [오늘을 닮은 그림책] 슬픔을 건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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